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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4645
성명
한자 尹滋瑛
이명 尹滋英, 丁一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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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2004 훈격 독립장
1919. 3월 경성법학전문학교(京城法學專門學校) 재학중 서울지역 학생운동(學生運動) 지도부의 일원으로 만세시위 운동(萬歲示威運動)을 주도, 일경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아 9개월간(個月間) 옥고(獄苦)를 치르고 1920.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상임위원(常任委員)집행위원(執行委員)에 선임되었으며, 1921. 1월 서울청년회 이사(理事)가 되었고 1921. 5월 상해파(上海派)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여 1922.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통합대회에 상해파 대표로 참여하고 1923. 3월 상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상해파 대표로 참석하여 안창호(安昌浩)그룹과 함께 개조파(改造派)를 형성,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강화에 노력하였으며, 1923. 6월 의열단(義烈團) 간부(幹部)로 김지섭의 투탄의거에 관여하였고 1926년 이후 노령(露領)만주(滿洲), 국내(國內)에서 사회주의 이념(社會主義理念)을 통한 민족 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을 지속적으로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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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19년 3월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에 재학 중 학생만세운동 지도부의 일원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일 경성전수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종로 부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곧 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의 집행위원과 지방부 위원을 맡았고, 1920년 12월 창립총회에서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21년 1월에는 서울청년회 조직에 참여 기관지인「아성(我聲)」의 편집위원으로 많은 글을 투고하였으며 순회강연 활동 등을 펼쳤다.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였으며, 5월에는 고려공산당(상해파)에 입당하고 기관지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그는 1921년 말에서 1922년 초 무렵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는 1922년 10월 러시아의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상해파 소속 마산지역 대표라는 직함으로 참가하였고, 의장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대회가 끝나고 1923년 1월 그는 대표 자격으로 코민테른에 파견되었고, 코민테른에 의해 꼬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곧 상하이[上海]로 돌아왔다. 국민대표회의에서 그는 고려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지도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여 개조파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뒤 그는 잠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1923년 6월에는 김지섭(金祉燮)의 투탄의거를 지원하였다. 이 사실이 드러나며 그는 일경의 추적을 받았으나, 1924년 4월 청년동맹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만주로 건너간 그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선전부 책임이 되었으나, 그 해 말 상해파와 화요파간의 분쟁과 관련하여 출당 조치를 당하였다. 1929년 3월 하순에는 돈화현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직부의 책임이 되었다.

1930년 10월 귀국하여 활동하던 그는 일경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이듬해 5월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선전부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유학을 위해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공산대학을 다니던 중 1938년 소련정부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獨立運動史資料20-臨政篇 Ⅴ-(國史編纂委員會, 1991) 27면
  • 청송의 독립운동사(김희곤 외, 청송군, 2004) 208∼214·254∼290·299·343면
  • 島山安昌浩資料集(Ⅰ)(國會圖書館, 1997) 67∼7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82∼88면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1976) 504∼506면
  • 朝鮮日報(1921. 6. 30, 1924. 4. 12·5. 16, 1931. 12. 8)
  • 東亞日報(1921. 8. 15)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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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윤자영 이명 : 윤석한(尹石漢, 尹錫漢), 윤정민(Юн Чен-мин), 정일영(丁一英), Yun Za-Yen, 호 : 소야(蘇野·笑也), 불가살(不可殺) 경북 청송(靑松) 서울 만세운동
본문
1894년 9월 13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청송읍(靑松邑) 금곡동(金谷洞)에서 태어났다. 파평(坡平) 윤씨 명은공파(冥隱公派) 후손이며, 의금부 도사를 지낸 윤만박(尹晩鎛)의 아들이다. 이명으로 윤석한(尹石漢·尹錫漢·Yun Za Yen)·윤정민(Юн Чен-мин )등을 사용하였다. 호는 소야(蘇野)·(笑也)·불가살(不可殺), 당명(黨名)은 정일영(丁一英)이다.1913년 전후 서울로 올라와 경성공업전습소 도기과(陶器科)를 다니다가, 1918년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에 입학하였다. 1919년 2월 학생만세시위의 경성전수학교 연락총책이 되어 주역들이 붙잡힐 경우 2단계 투쟁을 맡기로 결정하였다. 거사 당일 경성전수학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서울 시내 각급 학교 학생들을 만세시위에 동원하는 역할을 맡고, 종로 근처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11월 6일 징역 1년을 받고 1920년 7월까지 1년 4개월간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출옥하자마자 조선청년회연합회 결성에 앞장섰으며, 이를 이끌 구심체로서 서울청년회를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후 전국을 돌며 청년운동의 방향과 개조운동을 주제로 순회 강연회를 열었고, 서울청년회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위원을 맡아 사회 개조에 관한 글들을 발표하였다. 1921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에 참가하였다.1921년 5월 상하이(上海)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에 참여하였다. 이때 선전과 조직 사업에 참여하였다. 상해파 고려공산당 기관 잡지 『효종(曉鐘)』, 기관 신문 『투보(鬪報)』의 편집을 맡았다.1922년 10월 러시아의 베르흐네우딘스크[Верхнеудинск, 현 울란우데(Улан-Удэ)]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통합을 시도한 회의에 상해파 소속으로 참석하여, 의장단의 일원으로 의사 진행을 맡았다. 그 뒤 ‘대회 대표’ 자격으로 코민테른에 파견되어 모스크바(Москва)로 갔으나, 이르쿠츠크파의 반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코민테른은 두 그룹을 해산시키고 극동부 아래 꼬르뷰로를 설치하였다. 꼬르뷰로는 1923년 1월부터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두 파 대표를 모두 파견하였다. 상해파 대표이자 경북지방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는 한 축을 형성할 정도로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자(창조파), 기존 정부를 개조하자(개조파)는 주장이 맞설 때, 개조론을 지지하였다. 이 무렵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잠시 활동하였다. 이즈음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의 일본행을 도왔는데, 평소 우호관계를 다져놓았던 일본인 사회주의자의 도움으로 김지섭이 일본화물선편으로 일본에 잠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그 결실이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로 나타났다.1924년 4월 상해청년동맹회를 조직하고 조덕진(趙德津)·김상덕(金尙德)·장덕진(張德震)·최충신(崔忠臣)과 상무위원이 되었다. 당시 김지섭 의거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추적을 받으면서도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이 파악한 그의 이름이 윤석한(尹石漢)이고, 호는 불가살(不可殺)이었다. 1924년 유명무실해진 꼬르뷰로를 대신하여 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가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에서 결성되었다. 여기에서도 지도적 임무를 맡는 한편, 기관지 『거화(炬火)』의 편집을 맡았다.1926년 4월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 김찬(金燦)과의 제휴를 통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설하려는 목적이었다. 상해파로서 김찬·조봉암(曺奉岩) 등의 화요파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한 조선문제결정서인 「12월테제」로 파벌을 청산하고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1929년 3월 하순 둔화현(敦化縣)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김철수(金錣洙) 등과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1930년 10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는 사명을 갖고 국내에 들어왔다. 이에 앞서 1월부터 김철수를 비롯한 핵심 인물들이 잇달아 귀국하였는데, 「12월테제」를 내걸고 중국공산당에서 한인들의 합류를 요구하자 국내로 활동 무대를 옮겨 당 재건을 추진하려던 조치였다. 함남 함흥일대 중공업 밀집지역에 형성된 노동자층을 겨냥하여 김일수(金一洙)·조덕진과 터를 잡았다.1931년 1월 중순에 열린 제2차 간부회의에 참석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의 장래 문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이 중국공산당 가입을 요구하며, 한반도에서 철수를 지시함에 따라 1931년 5월 만주로 탈출하여 중국공산당 동만특구 선전부에 활동터전을 마련하였다. 1932년 9월 26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입학을 청원하여, 그해 모스크바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 학교는 각국 공산당 중앙간부들의 교육·훈련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국제레닌대학 입학 청원은 기각되는 대신,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이 허용되었다.스탈린 대숙청이 시작되던 1934년 지노비예프(Г. Зиновьев)의 동조자 혐의를 받고, 1938년 10월 14일 소련 노보시비리스크(Новосибириск) 내부인민위원부에 의해 반혁명혐의자로 몰려 총살되었다. 1958년 12월 19일 소련 정부로부터 복권이 이루어졌다.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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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1년,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등 공소 기각, 미결구류일수중 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1년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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