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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4월 16일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가양리(加陽里, 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3월 1일과 3월 5일 서울 탑골공원과 남대문역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동교생 곽기량(郭祺亮)으로부터 탑골공원에서 예정되어 있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계획을 전해듣고 이동하였다. 그리고 학생 등을 포함한 3,000~4,000명의 시위대와 함께 탑골공원을 나와 만세를 부르며 종로 1가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그리고 대한문 앞과 창덕궁·광화문을 거쳐 프랑스영사관 앞으로 이동하였고, 이후 의주통(義州通, 현 의주로 일대)·태평통(太平通, 현 태평로 일대)·장곡천정(長谷川町, 현 소공동 일대) 등을 지나며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이후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앞을 거쳐 본정(本町, 현 충무로 일대)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막히자, 1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약초정(若草町, 현 중구 초동 일대)을 거쳐 종로 3가로 나아갔다.
3월 4일 황금정(黃金町, 현 을지로 일대)에서 같은 학교 학생으로부터 다음날인 3월 5일 오전 9시에 남대문역 광장에서 학생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는 계획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3월 5일 오전 남대문역 앞으로 갔다. 오전 9시경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 강기덕(康基德)과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金元璧)이 인력거를 타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나타났고, 이후 시위대와 함께 남대문 방향으로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당시 학생들은 붉은 완장을 두르고 격문을 배포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1919년 3월 12일 오후 3시 10분경 종로 2가 청년회관 앞에서 붙잡혔고, 이후 오랫동안 예심을 받으면 옥고를 겪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종결결정과 함께 재판에 부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김봉렬(金鳳烈)·오충달(吳忠達)·한종건(韓鍾建) 등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산입),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21년 4월 16일에는 조선학생대회(朝鮮學生大會)에서 덕육부장(德育部長)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6월 이필근(李弼根)·양봉근(楊奉根) 등과 함께 경성의학전문학교 내에서 민족차별 발언을 한 일본인 교수 구보(久保武)를 배척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해 6월 7일 퇴학당하였고, 8일에는 동대문경찰서의 호출을 받고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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