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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3792
성명
한자 車榮鎬
이명 陳一秀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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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2 훈격 애족장
1919년 3월 서울에서 독립신문(獨立新聞) 발간을 위한 종이를 조달하고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25년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한혈단(韓血團)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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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차영호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중

국 상해(上海)에서 한혈단(韓血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보성고등학교를 나오고 반지를 파는 잡화상이었던 차영호는 상해에서 조선으

로 와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고한(高漢, 일명 고의봉(高義鳳))으로부터 조

선 독립을 위한 운동이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2시 반경 시위 군중들은 파고다공원의 정문과

후문으로 쏟아져 나왔는데 여기에 차영호도 끼어있었다. 차영호는 서소문정(의

주로)와 광화문앞(경복궁), 서대문 프랑스영사관 앞, 장곡천정(長谷川町, 소공동), 조선(한국)은행 앞, 본정(本町) 2정목(충무로 2가) 진고개, 영락정(저동), 수

표교(청계천2가), 파고다공원에 이르는 경로를 따라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였다.

또 장채극(張彩極)이 <독립신문> 제17호 등을 발간할 때 용지 조달이 곤란

해지자, 차영호는 동양용달회사에 의뢰하여 백지 20,000매를 준비했다. 그리고 3

월 하순에 자신의 상점에서 김유인(金裕寅)에게 백지 16,000매를 넘겨주어 <독

립신문>과 임시정부선포문 간행에 크게 조력을 했다.

시위 후 체포된 차영호는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

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후에 차영호는 상해로 건너가 김구(金九) 휘

하의 한혈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혈단은 1925년 1월에 조직된, 친일 부호

와 일제 고관을 암살하는 단체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1975) 제2권 103~114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1975) 제5권 58~82, 128~131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1975) 제9권 178~196면
  • 加平獨立運動史(가평향토문화추진협의회, 1985) 97, 98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1권 3~13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6권 133~135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7권 269~285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8권 107~111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9권 209~213면
  • 在士海 畿湖派 不逞鮮人이 조직한 韓血에 관한 건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 (5)
  • 每日申報(1919. 9. 7, 9. 8, 9. 9, 9. 10, 9. 11, 9. 14, 9. 15, 9. 16)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0. 4. 27)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11. 6)
  • 豫審終決決定文(京城地方法院:1919. 8. 30)
  • 朝鮮日報(1926. 8. 17)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차영호 진일수(陳一秀) 경기 가평 1919년 서울 만세운동
본문
1896년 6월 13일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군내면(郡內面)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진일수(陳一秀)이다.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해 와세다대학교(早稻田大學校)에서 수학하였다. 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관훈동(寬勳洞)에서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혈단(韓血團)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7일 상하이에서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고의봉(高義鳳)과 내왕하면서 해외 독립운동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였다. 또한 3월 1일 손병희(孫秉熙)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이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방법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파고다공원으로 이동하였고, 학생대표들이 주도하는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후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수천 명의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종로통(鐘路通) 대한문(大漢門)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이어서 시위대와 더불어 광화문(光化門), 의주통(義州通), 서대문(西大門), 장곡천정(長谷川町), 본정(本町), 영락정(永樂町) 등으로 이동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시 파고다공원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3월 중순 경에는 󰡔독립신문󰡕 제17호 등을 발간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장채극(張彩極)·김유인(金裕寅)으로부터 용지 조달을 부탁받았다. 이에 동양용달회사(東洋用達會社)을 통해 󰡔독립신문󰡕 제작을 위한 백지 20,000매를 구해 주었다. 또한 3월 하순 경에도 운영하던 잡화점에서 김유인에게 다시 백지 16,000매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독립신문󰡕 제17호와 제27호, 「임시정부선포문」 등이 원활하게 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 만세운동 참여와 󰡔독립신문󰡕·「임시정부선포문」 제작에 참여한 사실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에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0년 4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친일 부호와 일제 고관의 암살을 목적으로 김구가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한혈단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한혈단 활동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병을 얻었고, 결국 1926년 8월 8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1년,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공소 기각 경성복심법원 1920-04-2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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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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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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