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차영호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중
국 상해(上海)에서 한혈단(韓血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보성고등학교를 나오고 반지를 파는 잡화상이었던 차영호는 상해에서 조선으
로 와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고한(高漢, 일명 고의봉(高義鳳))으로부터 조
선 독립을 위한 운동이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2시 반경 시위 군중들은 파고다공원의 정문과
후문으로 쏟아져 나왔는데 여기에 차영호도 끼어있었다. 차영호는 서소문정(의
주로)와 광화문앞(경복궁), 서대문 프랑스영사관 앞, 장곡천정(長谷川町, 소공동), 조선(한국)은행 앞, 본정(本町) 2정목(충무로 2가) 진고개, 영락정(저동), 수
표교(청계천2가), 파고다공원에 이르는 경로를 따라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였다.
또 장채극(張彩極)이 <독립신문> 제17호 등을 발간할 때 용지 조달이 곤란
해지자, 차영호는 동양용달회사에 의뢰하여 백지 20,000매를 준비했다. 그리고 3
월 하순에 자신의 상점에서 김유인(金裕寅)에게 백지 16,000매를 넘겨주어 <독
립신문>과 임시정부선포문 간행에 크게 조력을 했다.
시위 후 체포된 차영호는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
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후에 차영호는 상해로 건너가 김구(金九) 휘
하의 한혈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혈단은 1925년 1월에 조직된, 친일 부호
와 일제 고관을 암살하는 단체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1975) 제2권 103~114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1975) 제5권 58~82, 128~131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1975) 제9권 178~196면
- 加平獨立運動史(가평향토문화추진협의회, 1985) 97, 98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1권 3~13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6권 133~135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7권 269~285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8권 107~111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제19권 209~213면
- 在士海 畿湖派 不逞鮮人이 조직한 韓血에 관한 건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 (5)
- 每日申報(1919. 9. 7, 9. 8, 9. 9, 9. 10, 9. 11, 9. 14, 9. 15, 9. 16)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0. 4. 27)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11. 6)
- 豫審終決決定文(京城地方法院:1919. 8. 30)
- 朝鮮日報(1926.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