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19년 당시 경성공업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學校) 부속 전습소 1년생이던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韓偉鍵)·김형기(金炯璣), 경성공업전문학교의 김대우(金大羽), 경성전수학교의 전성득(全性得)·윤자영(尹滋瑛) 등과 함께 학생대표로서 만세운동을 계획·주도하였다.
이형영은 경성공업전문학교 부속 전습소 학생대표로서 동교생들에게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의 시위와, 3월 5일의 학생시위에 참가하도록 설득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그는 사전 약속대로 탑골공원으로 나갔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갑자기 장소를 바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였다. 이에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대를 형성하여 시가행진에 나섰다. 이때 그는 군중들과 함께 종로(鐘路) 네거리로 진출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7권 48면, 제18권 228·244·2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58∼82·99∼104·155∼184면, 제13집 95∼121·140∼14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03∼114면, 제9권 178∼206면
- 每日申報(1919. 11. 8)
- 韓國獨立運動(金正明, 1966) 제1권 831∼852면
- 韓國獨立史(文一民, 1956) 106∼10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