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19년 3월 26일 서울 서대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3월 1일 이후 서울에서는 몇 차례 대규모의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3월 23일부터는 주로 야간을 이용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6일 이후는 그 형세가 더욱 거세어져 10여 명에서 100여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들이 서울 시내 각처에서 봉기하여 만세를 연달아 부르면서 돌진하는 일이 흔해졌다.
그리하여 3월 26일 저녁 8시경 누하동(樓下洞) 신명학교(新明學校) 마당에서는 이 학교 교사 이범구(李範九)가 박순장(朴淳璋)·김진영(金鎭永) 등 백여 명의 시민과 함께 모닥불까지 피워 놓고 만세를 고창하였다. 삼청동(三淸洞)에서는 김경준(金敬俊)·김재완(金在完) 등이 노상에 모인 수 백명의 군중과 같이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또한 종교(宗橋)파출소 부근에서는 박귀돌(朴貴乭) 등 100여 명의 시민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어 파출소에 투석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이 날 이한준은 종교파출소 앞에서 군중들 300여 명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세종로를 거쳐 충정로 1가 쪽으로 행진하였다. 그는 김찬희(金讚熙)·유인수(兪仁洙)와 함께 광화문 파출소에 이르러 돌을 던지며 만세시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야주현(夜珠峴) 어귀까지 진군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 전차 운전사가 난폭하게 운전함으로써 승객이 부상당하는 광경을 보게 된 이한준 등 시위군중들은 분개하여 전차를 향해 돌과 기와조각 등을 던져 전차를 크게 부수었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왕래(往來) 방해·소요 등으로 징역 1년을 받고 8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고, 10월 20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5. 28. 京城地方法院)
- 判決文(1919. 10. 20. 高等法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別集 第7輯 29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202-209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