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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3244
성명
한자 魚大善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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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년 3.1운동시 김백원(金白源), 김경덕(金敬德), 명이항(明以恒) 등 12인의 명의(名義)로「선언장서(宣言長書)」를 작성하여 총독(總督) 장곡천(長谷川)의 면담을 요청하는 한편 선언서를 낭독하여 한국독립의 정당함을 역설하는 등 활약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여 8월형을 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동아일보(東亞日報) 1950.3.1 게재(揭載) 「숨은 3.1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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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서울 출신으로, 190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경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수많은 학생·시민과 함께 여러 대열로 나누어 시가 행진을 하였다.

이 때 그는 운집한 학생·시민의 선두로 나아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하자는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군중과 함께 행진하였다.

또 3월 5일에는 고양군 청량리(淸凉里)에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 4월 8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831면
  • 판결문(김연술선생포상신청서보존)
  • 벽옥김창숙일대기 9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81·183·197·20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9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7·47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61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0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67·73·75·128·129·131·157·160·173·177·182·18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어대선 - 서울 탑골공원 만세시위, 청량리 만세시위, 임시정부 자금모집
본문
1871년 9월 6일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加南面) 신문동(新文洞, 현 대신리)에서 태어났다. 본적지는 서울 가회동(嘉會洞) 56번지였으며 유생이었다. 본관은 함종(咸從), 호는 시제(時齊)이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3월 5일 유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청량리 만세시위에서 연설을 하였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나섰다.1919년 3월 1일 오후 3시 경 종로사거리에서 탑골공원을 나와 행진하는 군중에 합류하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와 함께 대한문·서대문을 지나 독립문을 돌아 아현리(阿峴里)까지 갔다가 다시 서대문까지 행진하였다. 3월 5일에는 고종의 반혼제 때 마차가 청량리를 지나가면 청량리에서 유생들이 모여 통곡을 하기로 한 계획을 알고 청량리에 나갔다. 이 자리에서 “파리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므로 우리도 독립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연설 도중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어 연설을 중지하고 유준근(柳濬根)·송주헌(宋柱憲)·백관형(白觀亨) 등을 포함한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3월 12일에는 영흥관(永興館)에 모여 13도의 대표로서 김백원(金百源)·문일평(文一平)·차상진(車相晋)·조형국(趙� 國)·문성호(文成鎬) 등의 목사·유생 11명과 함께 「애원서(哀願書)」라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애원서」는 손병희(孫秉熙) 등의 33인의 독립선언을 계승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차상진·문성호는 「애원서」 한 부를 조선총독에 제출하였으며, 문일평은 종로 보신각 앞에서 이를 낭독하였다.이로 인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4월 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풀려난 후인 1921년 3월경 이영선(李英善)에게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독립운동비 모집 의뢰장과 임시정부 발행 명의의 독립공채증서를 교부 받았다. 당시 태극교 교육과장으로 임시정부를 위한 독립운동비를 제공하기 위해 남부지방의 유생들을 중심으로 독립공채를 판매하고자 하였다. 변호사 이중혁(李重赫)에게 독립운동자금 모집 계획을 알리고 공채 12,200원을 전달했다. 이에 이중혁은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있던 윤철(尹喆)에게 독립운동비를 위탁하였다. 1921년 5월 24일 윤철의 집에서 윤철·이중혁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22년 3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22년 9월 6일 경성복심법원의 재판이 있기 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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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8월,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등 공소 기각, 미결구류일수중 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20-04-08 국가기록원
5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공갈미수 당지방법원 공판에 부침 - 1921-12-19 국가기록원
6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징역 3년 경성지방법원 1922-03-30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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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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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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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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