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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3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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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廉命石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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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1 훈격 대통령표창
1919년 3월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에서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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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6일 밤, 김완수(金完洙)의 주도로 동뚝섬(東纛島)과 서뚝섬 주민 수백 명이 여러 곳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원룡(申元龍)과 최자근동(崔者斤洞)이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하며 한 곳으로 모으려 하였으나, 일본 헌병이 공포를 쏘아 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때 김완수는 '공포다. 도망가지 말라'고 소리치며 군중을 다시 모았다. 그러나 군중이 다시 모이기 전에 문창호 등은 체포되고, 염명석은 복부와 팔에 총상을 입고 도주하였다. 그후 4월 10일 염명석이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을 알아낸 경성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염명석은 1919년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4집 398~39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274~275면
  • 每日申報(1919. 4. 13)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137면
  • 新韓民報(1919. 6. 5)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7. 14)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5. 9)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염명석 - 경기 고양 고양군 만세시위
본문
1885년 8월 13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 현 서울특별시 성동구와 광진구의 일부) 서독도리(西纛島里, 현 뚝섬 서쪽 일대)에서 태어났다. 지역에서 짐차에 화물을 싣고 내리는 화물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19년 고양군 독도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1919년 당시 고양군은 서울과 북서부 넓은 지역에서 경계를 접한 지역이었다. 서울과 관련성이 높았던 지리적 특성의 영향으로 서울과 경계를 접했던 고양군 남부 지역 만세운동은 서울 만세시위와 민감하게 연동되어 전개되었다.특히 3월 26일 독도면에서는 지역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고양군 내에서 최대 규모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만세시위에 앞서 3월 23일부터 「주의서(注意書)」란 제목의 3쪽 분량 유인물이 서독도리 일대에 유포되었다. 그 내용은 “3월 26일 오후 7시 30분 우물터에 모여 만세운동을 하자”는 격문이었다. 아직까지 이 유인물을 배포한 세력은 알려지지 않지만, 실제로 이날 뚝섬에서는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날 시위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마차꾼 김완수(金完洙), 공장 노동자인 신원룡(申元龍)과 최자근동(崔者斤洞) 등이 주도하였고, 그 외 지역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이때 지역에 유포된 「주의서」의 내용을 사전에 파악하고 주변의 동료 노동자들인 최쇠명(崔釗明)·김용봉(金用奉)·문창호(文昌鎬)·유호길(柳浩吉)·양대삼(梁大三)·김봉룡(金鳳龍)·이창룡(李昌龍)·김일남(金一男) 등과 함께 3월 26일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날 저녁 무렵부터 서독도리의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소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만세시위대가 속속 면사무소 앞으로 집결하면서 밤 9시경 독도면 만세시위는 하나로 통합되어 2,000여 명 규모의 대규모 만세시위로 발전하였다.그 날 밤, 김완수 등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와 면장의 집을 습격하고 면서기를 구타하였다. 최쇠명·김용봉·문창호 등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서 선봉대 역할을 했던 300여 명의 노동자 부대에 참여하여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격렬한 시위를 한동안 전개하였다. 이후 김완수 등이 일제 헌병대 측과 교섭하여 만세시위를 해산하려던 중 서울에서 증파된 일제 헌병들이 도착하였다.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로 대응하며 시위대의 선두에 있던 인물들을 붙잡기 사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1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103명이 붙잡혔다. 당시 간신히 체포는 면했으나, 복부와 팔에 부상을 입고 피신하였다. 이후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송영복(宋榮楅)과 함께 치료받던 중 이를 탐지한 일제의 경성헌병대에 의해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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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1919-05-09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공소 기각 경성복심법원 1919-07-14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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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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