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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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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嚴昌根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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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1 훈격 애족장
1919년 3월 서울 봉래정(蓬萊町) 공터 및 의주통(義州通) 방면에서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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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서울 봉래정(蓬萊町)과 의주통(義州通) 방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2일 오전 9시 30분경 조선약학교 김공우(金公瑀),휘문고등보통학교 정지현(鄭志鉉) 등 학생들의 주도로 봉래동(蓬來洞) 공터에서 노동자의 만세운동 참가를 촉구하는 노동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중림동(中林洞),화천정(和泉町, 현 순화동) 부근의 노동자 3~400명을 포함하여 7~800명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의주로(義州路)로 진출하였다. 선두에는 엄창근이 '노동자대회','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손에 들고 행진하였다. 이들 시위 대열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아현(阿峴)고개까지 행진하였고, 다른 대열은 독립문까지 이르렀다. 이때 신형균(申衡均)이 프랑스영사관 앞에서 '조선독립을 꾀함은 바로 이때다. 각자는 이를 위하여 신명(身命)을 버릴 각오를 하라'고 외쳤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종로경찰서와 본정(本町)경찰서, 고양군 주둔 일본군 병력까지 출동시켜 강제로 시위를 해산시켰다.

이 일로 체포된 엄창근은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서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5집 150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5. 6)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222~224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11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엄창근 - 충남 당진(唐津) 서울 봉래정·의주통 만세운동
본문
1881년 4월 26일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면천면(沔川面)에서 태어났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남대문통(南大門通, 현 남대문로) 5정목(五丁目, 현 5(街))에 거주하면서 노동자로 생활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1919년 3월 1일 이래 서울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연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나, 3월 중순에 들어가면서 서울의 만세시위는 침체기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의 강도 높은 무력 탄압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많은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지방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독립선언문 등을 가지고 귀향한 것도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서울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려는 세력은 노동자의 참여를 통해 서울에서 새로운 만세운동의 동력을 찾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서울에서는 ‘노동자대회(勞動者大會)’가 추진되었다.1919년 3월 17일 경,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학생 정지현(鄭志鉉)은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 학생 김공우(金公瑀)를 만나 “그동안 서울에서 학생들이 주도하여 조선 독립 운동을 개시하였으나 그 힘이 미약하다. 이 기회에 노동자 계급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니 지금부터 「노동회보(勞動會報)」를 여러 지역의 노동자들에게 배부하여 이들에게 독립운동을 촉구하라”고 당부하였다. 김공우는 이를 자신의 친구인 배희두(裴熙斗)와 협의하여 “노동자는 조선의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노동회보」 11장을 3월 20일 경 화천정(和泉町, 지금의 순화동) 부근의 길거리에서 통행인에게 배포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정지현과 김공우를 비롯한 학생들은 3월 22일 오전 9시 경부터 남대문역 근처 봉래동(蓬來洞) 공터에서 노동자의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는 ‘노동자대회’를 개최하였다.학생들이 배포한 「노동회보」를 보고, 조선의 독립 운동에 노동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에 공감하여 주변의 지인들과 함께 3월 22일 봉래동의 ‘노동자대회’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노동자대회’에는 중림동(中林洞)과 화천정(순화동) 부근의 노동자 300~400명을 포함한 약 700~800명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노동자대회’를 마친 후, 시위 대열을 형성하여 의주통(義州通, 지금의 義州路) 방향으로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 행진을 시작하였다. 태극기와 함께 ‘노동자대회’·‘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이 만세시위대의 선두에 섰다. 이때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의 깃발을 들고 아현(阿峴)고개까지 만세시위대의 행진을 선도하였다.시간이 갈수록 만세시위대가 더욱 확대되면서 서울의 중심가 방향으로 행진하여 죽첨정(竹添町, 지금의 충정로)까지 다가오자, 일제는 종로경찰서와 본정(本町, 현 忠武路)경찰서, 고양군(高陽郡) 주둔 군대를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만세운동 이후 일제가 민심 수습을 위해 실시한 ‘은사령(恩赦令)’에 의해 1920년 4월 28일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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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 경성지방법원 1919-05-06 국가기록원
2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징역1년 경성지방법원 1919-05-08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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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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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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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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