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자유민보』는 1919년 3월 하순경 최석인·백광필·류연화(柳淵和) 등이 모여서 독립문제에 관하여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자신들의 취지를 밝힌 전단을 만드는데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조선국민자유단’의 이름으로 “근래 조선인 지식인 사이에서 조선인에게 출판·언론의 자유를 주고 조선에서 식민지라는 이름을 없애며 대의사(代議士)를 제국의회(帝國議會)에서 선출시키고 헌병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여 이것이 채택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자가 있으나, 우리는 이들의 말에 현혹됨이 없이 단연코 이 기회에 조선을 일본의 통치 하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이 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분투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취지의 경고 문안을 담은 전단 300매를 인쇄하여 동대문 주택가에 투입 배포하였다.
최석인·백광필·류연화는 『자유민보』라는 제목으로 저작물을 출판할 것을 모의하고 백광필은 류연화에게서 자금 30원을 받아 인쇄 준비를 하였다. 류연화는 논설을, 최석인은 기타 기사를 기초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4월 1일부터 중순까지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은 독립해야만 한다”는 취지의 논설기사를 『자유민보』 제1호부터 제5호까지 실었다. 그리고 각 호 약 1,000매씩을 등사판을 사용하여 인쇄하였다. 류연화는 『자유민보』가 작성될 때마다 광화문 및 동대문 부근의 각 민가에 배포하였다.
백광필은 『자유민보』를 인쇄·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다.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1919년 8월 28일 상고가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2월 17일 출소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5. 26)
- 판결문(경성복심법원:1919. 7. 4)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33권 66~67면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