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서울 안국동(安國洞)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순사보를 위협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1일부터 5일까지 서울에서 10여만 군중이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자, 일제는 시위자를 대상으로 검거에 나섰다. 그러나 3월 9일 상인들은 철시(撤市)로 저항하는 한편, 공장 직공들은 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처럼 10여 일 동안 잠잠하던 서울의 만세시위는 3월 22일부터 다시 시작되어 26일에는 거의 시내 전역에서 시위가 전개되는 등 최고조에 달하였다. 박학준은 26일 안국동에서 3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양준식(梁俊植)이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가 그 집에서 식사하는 순사보(巡査補)에게 '만세를 부르는 자를 체포하는 순사보,헌병,헌병보조원의 집은 불태워 버린다'고 경고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박학준은 1919년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왕래방해,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203~205, 208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116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4권 188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