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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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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朴貴乭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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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7 훈격 애족장
1919년 3월 26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50여 명의 군중들에 솔선하여 종교(宗橋)파출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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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자 서울의 각 지역에서는 독립만세시위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평화적인 한국인들의 독립 만세시위에 대해 일제의 폭압적인 진압과 구금 및 고문이 이어졌으며, 시내 전역에 대한 주도면밀한 경계태세는 시위 움직임을 억눌렀다. 이에 따라 3월 1일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군중시위와 3월 5일 학생단 시위와 같은 수만 또는 수십만 대규모 시위는 계속되지 않았다. 3월 8일 용산에서 200명, 3월 10일 동대문에서 300명 등 200~300명 규모의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났을 뿐이었다.

3월 12일 보신각 앞에서 「애원서」라는 이름의 제2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던 것은 이런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낭독자 문일평을 비롯하여 안동교회 목사 김백원, 승동교회 목사 차상진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백관형, 문성호, 고예진 등 유림계 인사들이 꺼져가는 시위운동을 다시 일으키고, 조선총독부에 대해서는 한국의 독립을 허용할 것을 촉구하였다.

제2의 「독립선언서」가 보신각 앞에서 낭독되어 수백 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자 일본 경관이 출동하여 낭독자 문일평과 주도자들을 체포하여 끌고 갔다. 박귀돌은 1919년 3월 26일 오후 8시 반경 약 50명의 군중과 같이 경성부 종교경찰관파출소에 몰려가서 파출소를 포위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돌을 던졌다.

박귀돌은 1919년 3월 26일 경성부 종교경찰관파출소의 만세시위 및 투석으로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1919년 6월 21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2월 21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4. 26)
  • 판결문(경성복심법원:1919. 5. 23)
  • 판결문(고등법원:1919. 6. 21)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9권 5~1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귀돌 - 서울 경성부 만세시위
본문
1893년 1월 23일 서울 사직동(社稷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동아연초회사(東亞煙草會社) 직공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경성부 종교경찰관파출소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1919년 3월 12일 서울에서 ‘제2의 독립선언서’라고 불리는 「애원서(哀願書)」가 발표된 이후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애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문일평(文一平)이 안동교회(安洞敎會) 김백원(金百源) 목사를 만나 민족대표 명의의 독립선언서 후속으로서 준비한 문서였다. 문일평은 승동교회(勝洞敎會) 차상진(車相晋) 목사, 조형균(趙衡均)·문성호(文成鎬)·김극선(金極善)·백관형(白觀亨) 등과 함께 식어가는 만세운동의 불을 다시 지필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3월 12일 보신각 앞에서 문일평은 「애원서」를 낭독하며, 조국의 독립과 3·1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이는 일본 경찰의 엄중한 감시 하에 급격히 소강 상태로 접어든 서울 한복판의 만세시위운동을 자극하였으며, 시위운동의 열기는 다시 조성되었다.3월 26일 밤 8시경 약 50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서울 종교경찰관파출소로 몰려가 파출소를 포위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돌을 던졌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사람들을 독려하여 주먹 절반만 한 돌과 기와 등을 파출소에 집중적으로 투석하게 하였다. 이를 막아서는 순사보 등에게 “밖으로 나가 만세를 부르라. 만약 외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만세 고창을 독려하였다. 그러던 중 파출소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경찰이 그와 시위대를 향해 칼을 빼들고 휘두르자 해산하였다가 3월 28일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5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이에 다시 “나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正義) 인도(人道)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므로 유죄 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는 위법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12월 21일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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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징역 5년 경성지방법원 1919-04-26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소요 공소 기각 경성복심법원 1919-05-23 국가기록원
3 판결문 소요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6-2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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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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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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