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3. 1 경성고등보통학교 (京城高等普通學校) 1학년때 서울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고 바로 옥구 (沃溝) 로 귀향 (歸鄕) 하여 옥구군 (沃溝郡) 독립만세시위계획을 채만식 (蔡萬植) 김홍렬 (金洪烈) 등과 협의하고 1919. 3. 29 옥구군 (沃溝郡) 임피 (臨陂)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려고 추진하다 일경 (日警) 에게 사전탐지로 피체 (被逮) 되어 징역 1년, 2년간 집행유예를 받았으며 그후 1924년 상해 (上海) 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산하 (傘下) 인성학교 (仁成學校) 의 교사 (敎師) 로서 초빙되여 교민자녀 (僑民子女) 의 교육에 이바지하고 계속하여 중국 (中國) 에 체류하며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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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북 옥구(沃溝)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1학년 재학중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고, 옥구로 귀향하여 채만식(蔡萬植)·김홍렬(金洪烈)·최한풍(崔漢 )·김석종(金錫宗)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 200본을 제작하는 등 시위운동을 준비하였으나 일경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동년 6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24년 9월 23일 그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산하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사로 초빙되어 교민 자녀의 교육과 독립운동에 진력하였고, 1933년 3월에는 중국군관학교간부훈련단(中國軍官學校幹部訓練團)에 입단하여 무장투쟁능력을 기르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6. 20 大邱覆審法院)
- 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 警務局) 218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75面
- 朝鮮民族運動年鑑 19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529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