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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1114
성명
한자 金鎭浩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8 훈격 애족장
1907년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경상도(慶尙道) 대표(代表)로 활동하였고 1908년 이후 상동교회(尙洞敎會) 청년학원 교원, 전도사 등으로 활동하다가 그후 1919. 2. 28 서울 정동(貞洞) 자택에서 손병희(孫秉熙) 등의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를 오흥순(吳興順)에게 교부하여 러시아 영사관 관원에게 배포,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선도케 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어 징역7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3년을 받고, 미결(未決)로 4월이상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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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김진호는 1907년 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여 경상도 대표로 활동하였다. 또한 1908년 이후 상동교회 청년학원 역사교원을 지내다가, 상동교회가 해산당한 후에는 경성지방회의 전도사로 옮겨갔다. 비밀결사 신민회는 조직의 보안을 위해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1911년 일제에 의해 신민회 조직이 파괴당할 때에도 상당수의 인사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그리고 1916년 4월 배재학교 성서교원으로 활동하면서, 1919년 2월 28일 정동(貞洞)의 이필주(李弼柱) 목사 방에서 그에게 대한독립선언의 취지를 듣고,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1일 그는 독립선언서 인쇄물을 러시아영사관·미국영사관·프랑스영사관으로 보내기 위해 봉투에 넣고, 정오 경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 장용하(張龍河)로 하여금 중국 영사관에 이를 전달케 하였다. 그리고 오후 2시경 같은 학교 학생인 오흥순(吳興順)에게 러시아영사관에 선언서를 전달케 하였다.

그는 이런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으로 징역 7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愼鏞廈, 1985) 45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03∼11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95∼121, 140∼142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834面
  • 궁정교회역사자료집(김진호, 1953) 第2輯 31∼43面
  • 每日申報(1919. 11. 8)
  • 사상계(1962. 4月號) 287面
  • 愛山翁 歷(작자, 연대미상)
  • 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 목사(상동교회역사편찬위원회, 1979) 116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05∼123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진호 - 경상북도 상주(尙州) -
본문
1873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이안면(利安面) 가장리(佳庄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899년 상경하여 당시 세도가인 이용태(李容泰)의 문객으로 있으면서 말죽거리와 남대문 밖에서 훈장을 하였다.1905년 이후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全德基)의 설교와 인격에 감화되어 기독교에 입교하여 상동교회에 설치된 상동청년학원과 공옥학교(攻玉學校)에서 조선역사, 성경, 한문 등을 가르쳤다. 1907년경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김구(金九)·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 등과 항일운동에 나섰다. 1911년 상동교회 전도사로 임명되면서 전덕기 목사와 목회 활동을 비롯하여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2년에는 피어선성경학교(현 평택대학교)에 입학하여 목사직 훈련을 받았다. 1913년 감리교연회에서 전도사 임명을 받고 상동교회 소속 전도사로 와병 중이던 전덕기를 도와 목회에 전념하였다.1914년 2월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 해 3월 전덕기가 순직하면서 상동청년학원도 문을 닫게 되자,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연맹(황성YMCA)의 총무 신흥우(申興雨)의 주선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연맹에서 한문과 역사를 가르쳤다. 상동교회가 해산당한 후에는 경성지방회의 전도사로 옮겨갔다.1915년 신흥우가 배재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자 1916년부터 배재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치게 되었으며, 정동교회 전도사직도 겸직하였다. 이때부터 배재학교 학생들로 전도대(傳道隊)를 조직하여 전국순회 전도를 하면서 계몽사업에 힘썼다.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감리교 출신 민족대표인 목사 손정도(孫貞道)·이필주(李弼柱)·현순(玄楯)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서울 시내 각 외국영사관에 전달하는 일과 배재학교 학생들을 시위에 동원하는 일을 책임졌다. 그 해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러시아·미국·프랑스 영사관으로 보내기 위해 봉투에 넣고, 정오 경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 장용하(張龍河)로 하여금 중국 영사관에 전달케 하였으며, 오후 2시경에는 배재고보 학생 오흥순(吳興順)에게 러시아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케 하였다.이 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0년 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7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1920년 인천 내리교회(內里交會)에 부임하여 목회 활동을 하였고 그 해 10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1년 다시 배재학교 교목으로 부임하여 1935년 은퇴할 때까지 학생들에게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40년 함경북도에서 교회 분쟁이 일어나자 감독의 특별 파송으로 청진·어항·경성·주을·생기령 등의 교회를 맡아서 목회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징역 7월, 3년간 집행유예,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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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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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상동교회 서울특별시 중구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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