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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891
성명
한자 金允玉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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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8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5 서울 남대문(南大門) 역전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朝鮮獨立)’이라고 쓴 기와 적포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3년을 받고 미결(未決)로 8월간(月間)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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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황해도 송화(松禾) 사람이다.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서울역) 앞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1일의 만세시위운동에 이어 3월 5일에도 아침 서울역 광장에서 일대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서울역 광장에는 시위 군중이 점점 모이기 시작하였다. 중앙학교 1년생이었던 김윤옥은 김종현으로부터 거사계획을 전해 듣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서울역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강기덕, 김원벽 등과 함께 만세시위의 선두에서 시위군중을 주도해갔다. 그 뒤를 학생·군중들이 만세를 고창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남대문쪽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때 길가던 사람들도 이 행렬에 뛰어들어 5,000여 명이던 시위군중은 어느덧 10,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행렬이 남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중이던 일경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하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 50여 명이 일경에게 붙잡혔지만, 시위행진은 계속되었고 보신각까지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더욱 증강된 경찰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저지하자 시위군중들은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중상을 입고 75명이 종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8월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출판법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14輯 89·90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18輯 238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95∼121·140∼14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186·193面
  • 每日申報(1919. 11. 8)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17輯 45·46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58∼82·99∼104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윤옥 - 황해도 송화(松禾) 서울 만세시위
본문
1901년 1월 12일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연정면(連井面) 조령리(里鳥嶺)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중앙학교(中央學校) 학생이었다.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탑골공원에서는 학생 2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한 후 가두행진에 나섰다. 이때 이 대열에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3월 1일의 만세시위에 이어 3월 5일 아침에도 남대문 역 광장에서 학생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오전 9시 남대문 역 광장에 시위 군중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날 김종현(金宗鉉)으로부터 거사 계획을 전해 듣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璧) 등과 함께 만세시위의 선두에서 시위 군중을 주도해갔다. 그 뒤를 학생들이 따르며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치고 남대문 쪽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때 길 가던 사람들도 이 행렬에 뛰어들어 5,000여 명이던 시위 군중은 어느덧 10,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일단의 군중은 남대문 시장을 지나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을 거쳐 종로 보신각으로 향하였고, 다른 시위 행렬은 남대문에서 대한문을 거쳐 보신각에 이르러 합세하였다.시위 행렬이 남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 중이던 일제 경찰이 저지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하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 50여 명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지만, 시위 행진은 계속되었고 보신각(普信閣)까지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더욱 증강된 일제 경찰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저지하자 시위 군중은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중상을 입고 75명이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이 일로 붙잡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 3년간 집행유예, 미결구류일수 9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보신각 3·1독립운동 기념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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