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1919년 서울 남대문에서 2차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었고, 1920년대 중후반에는 함남 영흥(永興)에서 사상단체에 가입하여 대중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 역전 광장에서 한위건(韓偉鍵),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璧) 등 학생단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때 경성고보(京城高普) 4년생이었던 김용관은 전날 미리 연락을 받고 남대문 역전 시위에 참여하여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다. 이 시위로 김용관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월을 받았다.
1924년 6월 18일에는 고향인 함남 영흥(永興)에서 사상단체인 삭풍회(朔風會)를 조직하여 총무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삭풍회는 1924년 7월부터 1925년 2월까지 영흥군 홍인면(洪仁面) 면장 배척, 영흥농업보습학교 및 영흥보통학교 동맹휴교, 고원군(高原郡) 소작쟁의 등의 활동을 벌였다. 김용관은 1924년 9월 영흥청년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6년 12월 당시에는 중외일보 영흥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7월에는 영흥소비조합 발기인으로 창립준비위원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2차례의 옥고 등으로 폐병이 심해지자, 저도(猪島)에서 요양중 별세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每日申報(1919. 9. 7~11, 9. 14~16)
- 中外日報(1926. 12. 10, 1927. 7. 22)
- 朝鮮日報(1932. 4. 14)
- 開闢 제54호(1924. 12. 1) 80~82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제16집 293~295면
- 倭政時代人物史料(國會圖書館, 1983) 제5권 17~18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11. 6)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103, 112면, 제9권 184~192면
- 豫審終結決定文(京城地方法院:1919. 8. 30)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58~82, 95~9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3집 94~121, 140~142면
- 時代日報(1924. 9. 19, 9. 25, 10. 1, 10. 4, 10. 13,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