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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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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龍觀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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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1 훈격 건국포장
1919년 3월 서울 남대문에서 김승제(金承濟) 등과 태극기를 제작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執行猶豫) 3년을 받았으며, 1924년 함남(咸南) 영흥(永興)에서 삭풍회(朔風會)를 조직하여 강연회(講演會) 개최(開催)면장(面長) 배척(排斥), 동맹 휴교(同盟休校), 소작쟁의(小作爭議) 등을 지도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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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1919년 서울 남대문에서 2차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었고, 1920년대 중후반에는 함남 영흥(永興)에서 사상단체에 가입하여 대중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 역전 광장에서 한위건(韓偉鍵),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璧) 등 학생단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때 경성고보(京城高普) 4년생이었던 김용관은 전날 미리 연락을 받고 남대문 역전 시위에 참여하여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다. 이 시위로 김용관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월을 받았다.

1924년 6월 18일에는 고향인 함남 영흥(永興)에서 사상단체인 삭풍회(朔風會)를 조직하여 총무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삭풍회는 1924년 7월부터 1925년 2월까지 영흥군 홍인면(洪仁面) 면장 배척, 영흥농업보습학교 및 영흥보통학교 동맹휴교, 고원군(高原郡) 소작쟁의 등의 활동을 벌였다. 김용관은 1924년 9월 영흥청년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6년 12월 당시에는 중외일보 영흥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7월에는 영흥소비조합 발기인으로 창립준비위원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2차례의 옥고 등으로 폐병이 심해지자, 저도(猪島)에서 요양중 별세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每日申報(1919. 9. 7~11, 9. 14~16)
  • 中外日報(1926. 12. 10, 1927. 7. 22)
  • 朝鮮日報(1932. 4. 14)
  • 開闢 제54호(1924. 12. 1) 80~82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제16집 293~295면
  • 倭政時代人物史料(國會圖書館, 1983) 제5권 17~18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11. 6)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103, 112면, 제9권 184~192면
  • 豫審終結決定文(京城地方法院:1919. 8. 30)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58~82, 95~9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3집 94~121, 140~142면
  • 時代日報(1924. 9. 19, 9. 25, 10. 1, 10. 4, 10. 13, 12. 15)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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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용관 - 함경남도 영흥(永興) 서울 만세운동
본문
1894년 10월 1일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홍인면(洪仁面) 남산리(南山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919년 당시에는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고초를 겪었고, 이후에도 고향에서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1919년 3월 5일 서울에서는 학생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아침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남대문역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보성법률상업학교생인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학교생인 김원벽(金元璧) 등과 함께 만세시위의 선두에서 시위대를 주도하였다. 시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대는 10,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둘로 나뉘어 한 갈래는 남대문시장을 지나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을 거쳐 종로의 보신각(普信閣)으로 향했고, 한 갈래는 남대문에서 대한문을 거쳐 보신각에 이르러 합류하였다. 일본 경찰이 만세시위를 저지하면서 주도자 등 50여 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붙잡혔다.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개월을 받았다.서울에서 학교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24년 6월 함경남도 영흥에서 삭풍회(朔風會)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 7월부터 1925년 2월까지 영흥군 홍인면(洪仁面) 면장 배척 운동, 영흥농업보습학교와 영흥보통학교 동맹휴교, 고원군(高原郡) 소작쟁의 등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영흥청년회의 집행위원, 1927년 영흥소비조합 발기인을 역임하였으며, 중외일보 영흥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옥고로 인해 생긴 폐병이 심해져 요양하던 중 1932년 4월 3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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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 3년간 집행유예, 미결구류일수 9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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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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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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