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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789
성명
한자 金榮洮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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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8 훈격 애족장
1919년 3월 1일과 3월 7일 사이에 서울 관훈동(寬勳洞)에서 장종건(張悰鍵), 임승옥(林承玉) 등과 함께 독립신문 수백 매를 인쇄하여 배부하고 3월 1일에 파고다 공원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을 지나 대한문 앞, 광화문 앞 등지에서 시위행진을 하고, 동월 5일에도 서울 남대문 역 앞에서 있었던 제2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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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학생인 김영조는 2월 28일 밤 9시경에 같은 학교 학생 전성득(全性得)의 방에서 김기환(金基煥)과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이용하(李容夏)를 만나 조선의 독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밤에 들었다고 하며, 내일 오후 2시경 파고다공원에 가보면 한국의 독립을 계획하는 운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김영조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복을 입은 채로 오후 2시 10분경에 파고다공원에 갔다.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군중들이 모여 박수를 치고, 또 ‘독립만세’를 부르자 이에 호응하여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종로까지 갔다. 3월 2일 오전 10시경에는 관훈동 155번지 경성서적조합(京城書籍組合) 사무실에서 장종건·임승옥과 함께 『독립신문』 제2호를 등사판으로 200매를 인쇄하여 독립운동의 사실 및 경과를 알리고자 하였다. 또 3월 5일 오전 9시경에는 남대문역 앞으로 가서 학생들의 제2차 독립시위운동에 참가하려 했으나 조금 늦게 도착하여 시위군중이 남대문 근처에 왔을 때 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

김영조는 3월 1일 파고다공원 만세시위 및 독립신문 인쇄, 3월 5일 남대문 앞 만세시위에 참여 등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0년 4월 27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11. 6)
  • 판결문(경성복심법원:1920. 2. 27)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1992) 별집 제2집 28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영조 - 평안남도 평원(平原) 3.1운동
본문
1899년 3월 20일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조운면(朝雲面) 갈산리(葛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에 재학 중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1919년 2월 28일 밤 9시 무렵 친구 전성득(全性得)의 하숙방에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성전수학교 학생 대표였던 전성득과 함께 다음날 오후 2시경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열리는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3월 1일 교복 차림으로 오후 2시 10분경 탑골공원에 도착하여 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대문통(南大門通)을 거쳐 의주통(義州通), 정동 미국영사관 앞, 대한문 앞, 광화문 앞 등을 지나 서대문통(西大門通) 프랑스영사관 앞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대한문 앞으로 나와 장곡천정(長谷川町, 현재 소공로), 조선은행 앞을 지나 본정통(本町通, 현재 명동)까지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곳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자 흩어져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3월 2일 관훈동 155번지에 위치한 경성서적조합에서 장종건(張悰鍵)·임승옥과 함께 『조선독립신문』 제2호를 인쇄하였다. 장종건은 천도교 지도자인 이종린(李鍾麟)의 집에 가서 원고를 받아왔고 등사원지에 원고를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장종건·임승옥과 함께 원지에 종이를 대고 롤러를 미는 작업을 번갈아 가면서 하였다. 이날 인쇄한 신문은 다시 이종린이 사람을 시켜 종로통 북쪽 민가에 수십 매를 배포하였다. 이 신문에는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을 하고, 임시정부를 설치하여 임시 대통령을 선거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날 인쇄된 신문은 다음 날인 3월 3일 자로 거리에서 『조선독립신문』 제2호로 배포되었다.3월 5일에는 서울 남대문역 앞에서 학생들의 주도로 제2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전날인 4일 밤부터 ‘제2회 독립운동을 개최하니 태극기를 가지고 오라’는 통문 약 400매를 인쇄하여, 시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아침 8시가 되자 남대문역 앞에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 등지에서 온 각 학교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이내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합류하여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였다. 일본 경찰이 시위대를 저지하자 남대문 시장, 조선은행, 종로 보신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보신각으로 모였다. 일본 경찰이 시위대 해산에 나서면서 붙잡혔다.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고, 1920년 4월 27일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등 공소 기각, 미결구류일수중 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20-02-27 국가기록원
3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1년 경성복심법원 1920-02-2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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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북한소재 국립묘지 외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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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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