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자 서울의 각 지역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연일 일어났다. 평화적인 한국인들의 ‘독립만세’ 시위에 일제의 폭력을 동반한 진압과 구금 및 고문이 이어졌다. 서울 시내 전역에 대한 주도면밀한 경계태세는 만세시위 움직임을 억눌렀다. 이에 따라 200~300명의 소규모 시위가 서울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 학생인 김공우는 1919년 3월 17일경 자택에서 휘문고등학교 학생 정지현(鄭志鉉)에게서 “지난번 경성에서 학생이 주도하여 조선독립운동을 개시하였으나 힘이 미약하였으니 이 기회에 노동자 계급의 원조를 받지 않으면 당초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니 『노동회보(勞動會報)』라는 인쇄물을 각지의 노동자에게 배부하여 이들을 독립운동자로 권유하라”는 취지의 의뢰를 받았다. 이에 김공우는 ‘노동자는 조선독립운동에 종사하기 바란다’는 내용이 기재된 『노동회보』 11매를 3월 20일경 경성 화천정(和泉町) 부근에서 행인들에게 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21일 정지현에게서 ‘22일 경성부 봉래정 공터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된다’는 것을 들었다. 21~22일 이틀에 걸쳐 중림동(中林洞)과 화천정 부근의 노동자들을 모아 노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김공우는 약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깃발을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아현방면으로 행진을 하였다.
김공우는 3월 22일 서울 봉래정 노동자대회에 참가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1919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6월 4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19권 5~12면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5. 6)
- 판결문(경성복심법원:1919. 6. 23)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