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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303
성명
한자 金公瑀
이명 金山公瑀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8 훈격 애족장
1919년 3월 17일경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 재학 중 서울에서 휘문고보(徽文高普) 학생 정지현(鄭志鉉)에게 독립운동에 함께 할 동지를 규합할 것을 의뢰받고, 동월(同月) 20일 ‘노동회보’라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21일과 22일 중림동(中林洞)화천정(和泉町) 일대의 노동자를 규합하여 봉래정(蓬萊町) 공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의주통(義州通)에서 아현(阿峴)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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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 규합(糾合) : 어떤 일을 꾸미려고 세력이나 사람을 모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자 서울의 각 지역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연일 일어났다. 평화적인 한국인들의 ‘독립만세’ 시위에 일제의 폭력을 동반한 진압과 구금 및 고문이 이어졌다. 서울 시내 전역에 대한 주도면밀한 경계태세는 만세시위 움직임을 억눌렀다. 이에 따라 200~300명의 소규모 시위가 서울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 학생인 김공우는 1919년 3월 17일경 자택에서 휘문고등학교 학생 정지현(鄭志鉉)에게서 “지난번 경성에서 학생이 주도하여 조선독립운동을 개시하였으나 힘이 미약하였으니 이 기회에 노동자 계급의 원조를 받지 않으면 당초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니 『노동회보(勞動會報)』라는 인쇄물을 각지의 노동자에게 배부하여 이들을 독립운동자로 권유하라”는 취지의 의뢰를 받았다. 이에 김공우는 ‘노동자는 조선독립운동에 종사하기 바란다’는 내용이 기재된 『노동회보』 11매를 3월 20일경 경성 화천정(和泉町) 부근에서 행인들에게 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21일 정지현에게서 ‘22일 경성부 봉래정 공터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된다’는 것을 들었다. 21~22일 이틀에 걸쳐 중림동(中林洞)과 화천정 부근의 노동자들을 모아 노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김공우는 약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깃발을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아현방면으로 행진을 하였다.

김공우는 3월 22일 서울 봉래정 노동자대회에 참가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1919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6월 4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19권 5~12면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5. 6)
  • 판결문(경성복심법원:1919. 6. 23)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공우 금산공우(金山公瑀) 서울 서울 만세시위
본문
1902년 2월 28일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는 서울 중림동(中林洞)에 거주하며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일제 말기의 창씨명으로 금산공우(金山公瑀)가 확인된다. 1919년 3월 17일 조선약학교 재학 중 잘 알고 지내던 휘문고보 학생 정지현(鄭志鉉)으로부터 학생 중심의 만세 시위는 힘이 약하니 노동자계급이 만세 시위에 나서도록 제작한 『노동회보(勞動會報)』를 배부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정지현의 권유를 수용하고 배희두(裵熙斗)에게 동참을 권하였다. 1919년 3월 20일 배희두와 함께 노동자는 한국 독립운동에 종사하기 바란다는 내용이 게재된 『노동회보』 11매를 화천정(和泉町, 현 서울 중구 순화동 일대) 부근 노상에서 시민에게 배포하였다. 또한 3월 21일과 22일 이틀간 서울 중림동과 순화동 부근의 노동자를 규합하며 노동자 대회 개최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22일 봉래정(蓬萊町, 현 서울 중구 만리동 일대)에서 열린 노동자 대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노동자들과 함께 의주로(義州路, 현재 서울 중구 의주로)로 진출하여 아현 고개까지 시위 행진하였다. 수백 명의 군중이 ‘조선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경찰과 군인이 출동해 시위대를 강제해산시켰다. 이 만세 시위로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19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1년 3월 3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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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2년 경성지방법원 1919-05-06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 경성지방법원 1919-05-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원판결 중 피고 관련부분 취소, 징역 1년 6월 경성복심법원 1919-06-23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9-04 국가기록원
5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1년6월 경성복심법원 1919-06-23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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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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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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