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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883
성명
한자 宋鎭禹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21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김성수(金性洙)와 손잡고 민족운동에 힘썼고 또한 중앙학교 교장(中央學校校長)으로 인재양성에 주력하다.

2. 1919년 3. 1운동시에는 48인의 1인으로 배후활약을 하여 피체(被逮)되어 1년 복역하다.

3. 동아일보(東亞日報) 사장(社長)으로 민족혼(民族魂)부식(扶植)하고 민족 여론(民族輿論)환기(喚起)시키다.

4. 덕국(德國) 수뇌부(首腦部)에 독립을 청원(請願)하다.

5. 1929년 광주학생 사건(光州學生事件) (時) 광주경찰서(光州警察署)편파적(偏派的) 처분(處分)에 대하여 조병옥(趙炳玉) 더불어 성토(聲討)하다.

6. 1945년 후 한민당(韓民黨)을 조직, 건국(建國)진력(盡力)하다가 한현우(韓賢宇)에게 피살(被殺)되다.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95, 96, 147, 148, 465 보안법위반(保安法違反) p.437, 404, 465 동아일보(東亞日報) 1920. 4. 6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 327, 기려수필(騎驢隨筆) p.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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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라남도 담양(潭陽) 사람이다.

1906년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서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수학하고, 1908년 김성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에 명치(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유학기간중에 유학생친목회(留學生親睦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을 편집하였다.

1915년에 김성수를 도와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중앙학교(中央학교)를 인수하여 학감(學監)이 되었다가 김성수의 뒤를 이어 1918년 3월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송진우의 관리 아래 중앙학교의 교육은 민족교육을 관철했으며 수많은 애국적 청소년들을 배출하였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이 2·8독립선언 준비차 귀국하여 송진우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송진우·현상윤(玄相允)·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 등이 빈번히 회합을 열고 초기의 3·1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으며 송진우는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을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 운동을 초기에 기획한 48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감옥에 구금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겪었다.

1921년 9월 14일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주식회사 동아일보」로 개편되자 제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11월 이상재(李相在)를 대표로 하고 지도급 인사 47명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이 사업을 적극 추진했으며, 동아일보를 통하여 민립대학설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1923년 3월 29일 각계 대표 400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여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하고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한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의 권총협박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하고, 1924년 동아일보사 고문, 1925년에는 동아일보 주필(主筆)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을 하였다.

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태평양연안 기독교청년회 주최로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가 개최되자 미국으로부터 참석한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국내대표로 암석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9월 일제 총독부가 「개벽(開闢)」잡지를 발행정지 시키자 한기악(韓基岳)·민태원(閔泰瑗) 등과 함께 일제의 언론탄압을 비판하고 교섭하여 발행정지의 해제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신천지(新天地)」와 「신생활(新生活)」의 필화사건이 일어나자 박승빈(朴勝彬) 등과 함께 언론자유의 옹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5년 11월에 함경남도 함흥경찰서가 시대일보(時代日報) 지방부장 홍남표를 불법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안재홍(安在鴻)·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무명회(無名會)의 교섭위원으로서 그의 석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1926년 3월에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전하는 글을 동아일보 3월 5일자에 게재했다가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함과 동시에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그와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金鐵中)이 일제 검찰에 구속 기소되어 1926년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징역 6월형, 김철중은 징역 4월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0월 제6대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손기정선수의 우승사진을 게재하면서 손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우고 실은 「일장기 말소사건」이 문제가 되자 동아일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도 사장을 사임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조직하여 수석총무로서 활동하다가 한현우(韓賢宇)에게 암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45·46·47면
  • 박은식전서 상권 514면
  • 기려수필 235·413면
  • 벽옹김창숙일대기 16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5·96·147·14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82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55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5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82·107·250·296·299·399·854·86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6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7·91·35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92·509·648·657·85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146·378·405·565·566·567·568·659·660·86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15·117·120·131·464·79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712·751·768·995·99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 15, 29, 40, 41, 6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42, 68, 109, 209, 249, 273, 291, 384, 1055, 128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4, 25, 35, 97, 123, 131, 254, 1443, 171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118, 840, 84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34, 62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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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송진우 호 : 고하(古下), 초명: 옥윤(玉潤) 전남 담양(潭陽) 3·1운동,
본문
1890년 5월 8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수북면(水北面) 남산리(南山里)에서 아버지 송훈(宋壎)과 어머니 양씨 사이에서 4남4녀 중 다섯째(4남)로 태어났다. 본관은 신평(新平)이며, 호는 고하(古下), 초명은 옥윤(玉潤)이다.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1896년 전남 장성에서 봉기하였던 의병장 기삼연(奇三衍)이 집으로 잠시 피신 온 것이 인연이 되어 기삼연에게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유학을 수학하였다.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한국이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자, 유학 수학에 한계를 절감하였다. 이때부터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을 구독하면서 한말 이래 자강론자들의 주장에 빠져들었다. 마침 아버지도 신학문을 배울 것을 적극 권유해 1906년 4월, 담양군 창평면에 고정주(高鼎柱)가 세운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갔으나,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1907년 후기의병(일명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김성수에게 “적을 치자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면서 일본 유학을 함께 갈 것을 설득하여 부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08년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고학 생활 끝에 1910년 4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8월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1911년 봄 재차 도일하였고 근대 국가의 법체계를 배우기 위해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로 옮기게 된다. 대학 시절 강의보다는 일본 정치계의 동향과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11년부터 1915년까지 각종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혁적 신문과 잡지를 애독하였다. 또한 다화회(茶話會) 회장, 재일동경조선유학생연합친목회 총무로서 활동하면서 재일 유학생들을 앞장섰고, 재일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1915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中央學校)의 학감으로 취임하면서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17년 일반 사회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단군과 세종대왕, 이순신의 3성을 받드는 삼성사건립기성회(三聖祠建立期成會)을 조직하고 경향 각지에서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1919년 만세운동 준비과정에서 재일 유학생과의 연락 및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결, 민족 대표 선발과 학생조직을 동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교장이었던 중앙학교는 이를 모의하고 추진하는 본부 역할을 담당했다. 이 때문에 3월 중순경에 붙잡혀 1년 7개월 간 옥고를 겪고, 1920년 11월 1일 풀려났다.1921년 1월 하순에 『동아일보』 사장으로 합류하게 되는데, 이후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사장·주필·취제역·고문 등으로 『동아일보』 운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 1922년 2월부터 지면을 통해 민립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오던 중, 같은 해 11월 발족한 민립대학기성준비회에 참여하였다. 1924년 결성된 ‘각파유지연맹’ 등 친일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에도 앞장섰다. 이 때문에 친일세력은 ‘ 육혈포 협박 사건’을 일으켜 폭행하고 위협을 가하였다. 이 사건은 폭행에 대한 민중대회 요구로 발전하였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금지당해 개최되지 못하였다. 1925년 7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제1회 태평양회의에 참석하였다가 귀국한 후, 조선사정조사연구회(朝鮮事情調査硏究會) 결성을 주도하였다.1926년 3월 3일 사회주의 계열의 국제농민본부가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전보 메시지를 『동아일보』에 게재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1928년 1월 9일 신간회 경성지회에 입회하였다.민족운동이 제대로 된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의 세력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대중, 그중에서도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농민대중의 단체행동의 경험과 민중사상의 통일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대중의 문맹퇴치가 가장 시급하다고 보았다. 1931년 7월부터 1934년까지 『동아일보』를 통해 매년 한 차례씩 4년간에 걸쳐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이후 우리의 독자적인 사상적 문화적 전통과 역사를 확립하는 것이 민족운동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며, 이를 통해 민족주의세력 주도의 자립적 근대국가건설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사상혁신’, ‘문화혁신’ 주장으로 나타나게 되고, 충무공을 비롯한 민족 위인들의 유적지 보전 운동과 한글에 대한 선양 사업 추진하였다.1936년 8월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10개월간의 무기 정간에 처해지자, 총독부는 정간 해제의 조건으로 주요 편집진, 관련 기자 총 13명의 인책 해직, 주요 간부 선임 사전 승인, 신문의 거의 모든 기사 내용과 편집방향을 규제하는 언론보도지침인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의 준수 등을 내세웠다. 이에 저항하여 싸웠지만, 10개월의 무기정간과 폐간을 위협하는 총독부 방침에 굴복하여 『동아일보』에서 물러났다.『동아일보』는 1937년 6월 정간 해제되었지만, 같은 해 7월 발발한 중일전쟁을 계기로 급격히 친일 논조로 전환하였다. 정간 해제 후 『동아일보』의 고문으로 위촉되었지만 예전과 달리 신문 경영이나 내용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병을 핑계로 집에서 소일하였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된 후 청산대표 취체역으로 청산 업무를 처리하고, 청산 업무가 마무리된 후에는 사옥을 관리하는 동본사(東本社) 사장 역할을 일시 담당하였다. 그렇지만 그 이외의 모든 정치 사회활동과 담을 쌓은 채 친일과 관련한 오점을 남기지 않았다.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는 수석 총무로, 국민대회준비회의 결성에는 위원장으로 이들 조직을 주도하였다. 임시정부가 당면의 과도정부 역할을 수행하면서, 정식 정부는 국내외의 반민족 분자를 제외하고 민주주의적인 각 정파의 제휴와 연결 속에 국민대회준비회가 주도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결성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정계개편 구상은 국민대회준비회의 1946년 1월 10일 ‘국민대회’ 개최 주장과 이를 위한 활동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른 ‘신탁통치’ 국면이 도래하고, 그 와중에 한현우(韓賢宇)에 의해 암살되면서 정개 개편 운동은 무산되었다.별도의 저술은 없고,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논설과 주장을 모은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가 간행한 『거인의 숨결-고하 송진우 관계 자료문집』이 있다.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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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피고 등에 대한 본건을 관할위로한다(담당할수없음) 경성지방법원 1919-08-0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09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무죄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가기록원
5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8월 경성지방법원 1926-04-01 국가기록원
6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 경성복심법원 1926-09-08 국가기록원
7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26-11-08 국가기록원
8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 경성복심법원 1926-09-08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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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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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동상 창동 3사자 동상 서울특별시 도봉구
2 생가 송진우 고택 전라남도 담양군
3 비석 3·1운동 책원비 서울특별시 종로구
4 동상 고하 송진우선생 동상 서울특별시 광진구
5 비석 고하 송진우선생 추모비 전라남도 담양군
6 기념관 고하 송진우선생 기념관 전라남도 담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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