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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649
성명
한자 李瓘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2월 천도교전도사(天道敎傳道師)편집원(編輯員)으로 손병희(孫秉熙), 이종일(李鍾一)과 함께 3.1운동봉기에 뜻을 같이하고 33인명의 독립선언서를 지방으로부터 상경한 대표에게 배부하며 활동하다가 격문기초자로서 피체되어 징역 7월,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아 미결로 8월 6일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1921년 미국(美國)「워싱턴」에서 군축문제를 다룰 열강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승인케 하고저 태평양회의 독립청원서에 국민대회 대표의 자격으로 서명하므로서 2년 7월간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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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 옥고(獄苦) : 옥살이를 하는 고생.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남 산청(山淸) 사람이다.

1919년 당시에는 서울 가회동(嘉會洞)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천도교 전도사 및 편집원(編輯員)으로 손병희(孫秉熙)·이종일(李鍾一)과 함께 3·1독립운동을 일으키는데 뜻을 같이 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이종일에게서 대한독립의 취지를 듣고 손병희 등 33인 명의의 독립선언서의 배부를 승낙하고 지방으로부터 상경한 대표에게 이를 배부하며 활동하는 동시에 3·1독립운동 당시 배부한 격문 기초자(檄文起草者)로서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월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미결기간으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1년 11월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군축문제(軍縮問題)를 다룰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한국의 독립을 승인케 하고자 임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구미위원장 서재필(徐載弼) 등에게 대표권을 주어 외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며 대한독립의 승인을 요청하는 독립청원서에 국민대회(國民大會) 대표의 자격으로 서명하고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11. 6 京城地方法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4卷 556·560·620面
  • 韓國民族運動史料(3·1運動編)(國會圖書館) 331·332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04∼123면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122·141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23面
  •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3卷 58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666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9輯 666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관 호 : 경암(敬菴) 경남 산청(山淸) 1919년 서울 만세운동
본문
1860년 12월 17일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단성면(丹城面) 남사리(南沙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호(號)는 경암(敬菴)이다. 유년기에는 같은 면 남사리 출신으로 유림의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을 주도한 곽종석(郭鍾錫)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8년부터는 손병희(孫秉熙)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상경하여 서울 가회동(嘉會洞)에 거주하였다. 천도교의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에 종교론과 시조 등을 기고하였고, 1915년부터 천도교 중앙총부의 도사실(道師室) 편집원으로 일하였다.1919년 만세운동의 준비과정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당시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계획한 대표 중 한 명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주익(朱翼)이 이전부터 한문을 수학하였다. 2월 20일 주익이 다른 학생대표이자 동교생인 강기덕(康基德)과 함께 찾아와 2월 8일에 있었던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과 장차 만세운동 궐기의 계획을 설명하고, 이에 사용할 격문의 교정을 부탁하였다. 평소부터 일제의 기만적인 식민통치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천도교 내의 독립운동 계획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2차례에 걸쳐 문장을 교정해주었다.2월 28일에는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맡은 보성사(普成社) 사장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독립선언서 52장을 수령하여 행인들에게 배부하는 한편, 문병을 위해 고향에서 방문한 지인들에게도 선언서를 전달하였다.3월 1일 만세운동이 궐기한 후에도 격문 제작 등을 통해 만세운동의 실행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박이근(朴理根)·권희목(權熙穆) 등과 뜻을 같이하며 금전과 물품을 지원하던 천도교 재무부원 허익환(許益煥)이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면서 발각되었다. 일제 경찰의 가택수색에서 학생대표들의 격문 교정을 위한 필사문서가 발견되면서 붙잡혔고, 불온문서 제작·배포 등을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60세의 노령으로 옥고를 겪으며 재판과정에서 조선총독부 판사 호리 나오요시(堀直喜)를 상대로 일제 식민통치의 기만성과 독립의 당위성을 강변하였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7월(미결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 산입),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1921년 9월 이재흥(李載興)과 함께 국민대회(國民大會) 대표로 워싱턴 군축회담[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서명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11월 11월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열강들이 군축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되는 회담에 한국의 독립을 승인케 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장 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활동하도록 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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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징역 7월, 3년간 집행유예,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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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산청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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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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