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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11월 24일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흥덕면(興德面) 송암리(松岩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字)는 계문(季文), 호(號)는 송천(松川)이다. 부친 가선대부 성제공(誠齊公) 시청(時淸)과 모친 죽산(竹山) 안씨(安氏)의 4남이다. 위로는 고순진(高舜鎭)·고용진(高龍鎭)·고덕진(高德鎭) 등 3명의 형이 있어 부친의 명에 따라 감농(監農)하며 가업을 보살폈으나, 문자 실력이 뛰어나다는 주위의 평에 따라 16세인 1890년부터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 17세가 되고서는 족형 수남(秀南) 고석진(高石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31세에 고석진의 인도로 충청남도 정산(定山)에서 대유학자인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만나 예폐를 바쳐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고 사제의 의리를 맺은 후, 문인으로서 학문과 뜻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면암은 조정에 상소하고, 단식을 시작하였다. 이에 고석진·고용진·고제만(高濟萬) 등과 함께 면암을 면담하였고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이후 전 낙안군수를 역임하였던 돈헌(遯軒) 임병찬(林炳贊)을 만나 면암과의 연합을 도모하였고, 의병 결성에 동의를 얻었다. 같은 해 (음)12월 25일에는 고석진과 함께 충남 노성(魯城, 현재 논산) 궐리사(闕里祠)에서 면암을 비롯한 200여 명의 유림·지사 등과 함께 논의하여 「창의선언격문」을 작성, 배포하기로 하였다. 여기에서 면암은 의병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인 1906년 음력 2월에는 면암을 비롯하여 고용진·고석진·고제만·임병찬과 함께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호남의병창의소를 설립하고 연락과 동원의 책임을 맡았다. 고창에서 의병 100여 명을 소집하고 고순진으로부터 군량미 200석을 기꺼이 제공받았다. 그 밖에도 군량미 500여 석과 군자금을 수합하여 병기를 구비하였다. 임병찬은 모병과 연병의 지휘 책무를 맡았고, 김기술(金箕述)·유종규(柳種奎)·정시해(鄭時海)·최제학 등도 임무를 나눠 맡았다. 거의 일자를 (음)4월 13일로 정한 면암 부대는 일본 정부에 16개 조목의 죄상을 언급한 서한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창의선언격문」을 전국에 배포하는 연락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이 사실이 군경에 밀고가 되어 10여 일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면암 부대는 흥덕·정읍·순창·곡성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음)4월 18~20일에는 순창 구암사(龜巖寺)에 머무르던 중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 군수 이건용(李建鎔) 및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아 교전하였고 정시해가 순국하였다. 면암·임병찬 등 13인은 일제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음)7월 면암과 임병찬은 대마도 위수영(衛戍營)에 투옥되었고 김기술과 양재해 등은 장 100대를 맞았으며, 고석진·최제학은 일본군 사령부에 4개월 감금형을 받았다. 하지만 (음)4월 19일에 모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으므로 13인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음)6월 17일에는 부친마저 별세하였다. 의병 활동을 이유로 11월에 다시 체포되어 1907년 2월 9일까지 전주감옥에 3개월여 수감되었다. 수감 당시 면암의 순국 소식을 전해 듣고 기진(氣盡)할 때까지 방성통곡하였다고 한다.
국권피탈 이후 1914년 무렵 족형인 고석진과 함께 2년 전인 1912년 고종의 명령에 따라 임병찬이 조직한 독립의군부에 가담하여 서기관으로 임명되었다. 호남 지역 유림이 중심이었던 독립의군부는 면암 문인들이 다수 참가하는 가운데 비밀 조직을 구성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1916년 임병찬이 거문도에서 순국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인산 일에 맞추어 고석진·고순진·고제만·김양수(金陽洙)·송주헌(宋株憲) 등과 함께 상경하였다. 3월 3일과 5일에 상례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의 상을 3년이 아니라 1년으로 마치는 것이 상례에 어긋나고, ‘황제’가 아닌 ‘대왕’으로 위호를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며, 을사늑약(1905)과 국권피탈(1910) 모두 일제의 협박에 의한 것이므로 순종이 황위에 올라 자주독립을 선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5일 상소를 제출한 직후 송주헌은 체포되었으나 여기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같은 달 12일에는 유준근(柳濬根)·조재학(曺在學) 등과 함께 조선국민대표(朝鮮國民代表)의 이름으로 장서를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나아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제안하고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137인 중 한 명이자 호남 대표 10인 중 두 번째로 서명하였다. 호남 지역에서 파리장서 서명을 독려하였던 유준근과 뜻을 같이한 것이다.
1928년에는 전북 고창에 도동사(道東祠)를 설치하여, 면암과 고석진의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치안 방해를 이유로 향사(享祀)를 금지시켜 광복 이후인 1946년에 재개하였다. 유고집으로 『송천집(松川集)』(13권4책, 1963)이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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