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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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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完水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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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성모 의진(成某義陣)에 소속되어 1908. 4월-5월 약 1천여 명의 군사와 함께 경북(慶北) 안동군 일대(安東郡一帶)에서 일본수비대 및 경찰과 교전(交戰)하는 등의 활동(活動)을 하다 피체(被逮)되어 유형(流刑) 10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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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영양(英陽) 사람이다. 성익현(成益鉉)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에 들어와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기화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케 하였다. 이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성익현은 1907년 음력 7월경 정경태(鄭敬泰)를 도총장(都總將), 변학기(邊學基)를 도총독(都總督), 이상렬(李相烈)을 부장(部將)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켜 관동창의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익현 의진은 1907년 음력 7월 25일 경북 평해(平海) 읍내에 설치된 경무고문분파소를 습격하여 병기와 군수품을 노획하였고, 이어 경북 울진군 읍내를 공격하여 군청 무기고에 있던 화승총 25정, 활과 화살 등 병기를 노획하여 의병부대의 화력을 강화하였다. 그런 다음 같은 해 음력 9월 12일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중군장 정정진(鄭正眞)과 연합한 성익현 의진은 울진군 읍내를 재차 공격하였고, 여기에서 이들 연합의병부대는 일본 경찰들을 소탕하여 읍내를 완전 장악한 뒤 군청·경무서·우체국과 그 부속관사, 일본인 및 부일배의 가택 10여 호 등을 소각하면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하순 울진군 원남(遠南)면 매화리(梅花里)에서, 이듬해 4월 5일에는 울진군 서면(西面) 옥피동(玉避洞)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하여 갔다. 김완수는 이같은 성익현 의진에 투신하여 1908년 4월부터 경북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1908년 5월 18일 성익현 의진이 이강년 및 김상태(金相泰) 의진과 연합하여 1천여 명의 대규모 연합의진을 형성한 뒤, 그 활동 근거지로 삼기 위해 경북 봉화군 내성(乃城)을 포위 공격할 때 참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8년 9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형(流刑) 10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435·43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완수 - 경상북도 영양(英陽) -
본문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이다. 생몰년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판결문에 따르면 1908년 당시 20세였으므로 1889년생으로 추정된다. 당시 주소지는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읍내면(邑內面) 서부동(西部洞)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가 소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 성익현(成益鉉) 부대에 참여하였다.1907년 7월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되고, 8월 대한제국군마저 강제 해산 당하면서 나라가 무너져가는 위기 속에서 항일의병은 최고조기에 달하였다. 특히 충북·강원·경북의 접경지대인 소백산맥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다.강원도 춘천(春川) 출신 성익현은 1907년 7월 창의하여 스스로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이 되어 휘하에 정경태(鄭敬泰)를 도총장(都總將), 변학기(邊鶴基)를 도총독(都總督), 이상렬(李相烈)을 부장(部將)으로 임명하여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三陟)·울진(蔚珍)·평해(平海), 경북의 영덕(盈德)·봉화(奉化)·안동(安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1908년 4월부터 성익현 부대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직후였다. 이 작전에 참여했던 이강년(李康秊) 부대가 강원에서 경북 봉화 지역으로 들어오자 성익현 부대는 이강년 부대, 김상태(金相泰) 부대와 연합하였다.1908년 5월 11일 의병 약 1,000여 명과 함께 안동군(安東郡) 애곡동(猚谷洞)에서 일본인과 한인들로 구성된 순사들과 접전 중 일본군 수비대의 지원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같은 달 15일 이강년을 비롯한 변학기·성익현·김상태·정경태 등이 이끄는 의병 1,000여 명이 봉화군 서벽리(西壁里)에 주둔하였다. 이때 영천(永川)수비대 등 일본 군경이 공격해 오자 이를 격퇴하고 봉화군 내성(乃城)으로 퇴각시켰다. 이강년의 우군장 변학기, 성익현, 김상태, 정경태, 백남규(白南奎), 정연철(鄭蓮哲) 등이 이끄는 의병 연합부대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내성까지 진격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내성 헌병분견소와 주재소의 헌병과 순사 20여 명 외에 예안(禮安)·영주(榮州)·예천(醴泉)·안동 등 여러 지역에서 지원·파견된 40여 명의 일본군경이 주둔해 있었다.같은 해 5월 18일 내성면 황매리(黃梅里)에 있던 의병 1,200명이 봉화 내성을 공격하여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격전을 치른 뒤 황매리로 회군하였다. 이 전투에서 20여 명의 의병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 후 일본 군경은 황매리로 의병들을 추격하였다. 이에 오록(梧麓)으로 퇴각하였는데, 당시 그곳에 집결한 연합 의병은 약 1,200명이었다. 5월 19일 일본 군경과 다시 한 차례의 전투를 치르고 각자 부대의 근거지로 이동하였다.이러한 활동을 하다 붙잡혀 1908년 9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형 10년을 받고 고초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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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죄 유형 10년 대구지방재판소형사부 1908-09-0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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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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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독립운동 합동 기념비 경상북도 영양군
2 비석 창의순절 기념비 경상북도 영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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