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영양(英陽) 사람이다. 성익현(成益鉉)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에 들어와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기화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케 하였다. 이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성익현은 1907년 음력 7월경 정경태(鄭敬泰)를 도총장(都總將), 변학기(邊學基)를 도총독(都總督), 이상렬(李相烈)을 부장(部將)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켜 관동창의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익현 의진은 1907년 음력 7월 25일 경북 평해(平海) 읍내에 설치된 경무고문분파소를 습격하여 병기와 군수품을 노획하였고, 이어 경북 울진군 읍내를 공격하여 군청 무기고에 있던 화승총 25정, 활과 화살 등 병기를 노획하여 의병부대의 화력을 강화하였다. 그런 다음 같은 해 음력 9월 12일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중군장 정정진(鄭正眞)과 연합한 성익현 의진은 울진군 읍내를 재차 공격하였고, 여기에서 이들 연합의병부대는 일본 경찰들을 소탕하여 읍내를 완전 장악한 뒤 군청·경무서·우체국과 그 부속관사, 일본인 및 부일배의 가택 10여 호 등을 소각하면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하순 울진군 원남(遠南)면 매화리(梅花里)에서, 이듬해 4월 5일에는 울진군 서면(西面) 옥피동(玉避洞)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하여 갔다. 김완수는 이같은 성익현 의진에 투신하여 1908년 4월부터 경북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1908년 5월 18일 성익현 의진이 이강년 및 김상태(金相泰) 의진과 연합하여 1천여 명의 대규모 연합의진을 형성한 뒤, 그 활동 근거지로 삼기 위해 경북 봉화군 내성(乃城)을 포위 공격할 때 참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8년 9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형(流刑) 10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435·4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