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미국 유타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부친 이학주의 엄명으로 1933년 5월 중국 상해(上海)로 도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김구(金九)와 이시영(李始榮)으로부터 우리말 국사, 민족문화사, 중국어를 교수받았으며, 이범석(李範錫)과 이청천(李靑天)에게서 독립운동방략을 학습받았다. 이때 김구는 조종사 자격을 갖고 있는 이모세에게 "하늘을 찌르라"는 뜻으로 이충천(李冲天)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1934년 2월부터 중국 남경(南京)에서 한인들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입학을 권유하는 한편, 남경 거주 일본간첩과 잠복관헌들의 색출을 위해 중국경찰과 협동작전을 전개하였으며, 1935년 4월부터는 낙양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박시창(朴始昌)과 함께 대위로 임관되어 낙양군관학교 교관으로 한국학생들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36년 12월부터는 김구의 명령으로 남경에서 엄항섭(嚴恒燮)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과 관계하며 영어 및 중국어판 신문기자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내용을 게재하였고, 항일투쟁과 독립쟁취에 관한 출판물을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출간하여 세계 각국에 배포하였다. 또한 {한민(閒民)} 3호에 [무장을 준비하자]라는 글을 기고하여 한인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37년과 38년에 걸쳐 한국국민당 청년단의 선전원으로 대외선전업무에 종사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1938년 4월 하와이로 귀국하였다.
그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1944년 미국 공군에 지원 입대하여 미군 제7 공군에 배속되어 활동하다가 해방후 퇴역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극동군 총사령부 정보국에서 활동하며 포로송환 등의 활동에 기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567面
- 韓國國民黨 靑年團 任命狀
- 3개국 군대생활로 조국에 이바지한 모세·李씨(1968 발간추정)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45面
- 功勞褒賞推薦書(朴始昌·金弘壹·朴英俊·安椿生, 1964.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