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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916
성명
한자 李冲天
이명 이모세, Moses Lee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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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2003 훈격 애족장
미국 하와이 출신으로 1933년 중국에 와서 1934년부터 1935년까지 한인들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입교를 권유하였고, 동교의 교관으로 한인들에 대한 군사교육을 시켰고, 1936년 『한민(韓民)』 3호에 「무장을 준비하자」라는 글을 기고하여 한인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촉구하였고, 1937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산하 청년단의 선전원(宣傳員)으로 1938년까지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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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미국 유타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부친 이학주의 엄명으로 1933년 5월 중국 상해(上海)로 도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김구(金九)와 이시영(李始榮)으로부터 우리말 국사, 민족문화사, 중국어를 교수받았으며, 이범석(李範錫)과 이청천(李靑天)에게서 독립운동방략을 학습받았다. 이때 김구는 조종사 자격을 갖고 있는 이모세에게 "하늘을 찌르라"는 뜻으로 이충천(李冲天)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1934년 2월부터 중국 남경(南京)에서 한인들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입학을 권유하는 한편, 남경 거주 일본간첩과 잠복관헌들의 색출을 위해 중국경찰과 협동작전을 전개하였으며, 1935년 4월부터는 낙양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박시창(朴始昌)과 함께 대위로 임관되어 낙양군관학교 교관으로 한국학생들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36년 12월부터는 김구의 명령으로 남경에서 엄항섭(嚴恒燮)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과 관계하며 영어 및 중국어판 신문기자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내용을 게재하였고, 항일투쟁과 독립쟁취에 관한 출판물을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출간하여 세계 각국에 배포하였다. 또한 {한민(閒民)} 3호에 [무장을 준비하자]라는 글을 기고하여 한인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37년과 38년에 걸쳐 한국국민당 청년단의 선전원으로 대외선전업무에 종사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1938년 4월 하와이로 귀국하였다.

그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1944년 미국 공군에 지원 입대하여 미군 제7 공군에 배속되어 활동하다가 해방후 퇴역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극동군 총사령부 정보국에서 활동하며 포로송환 등의 활동에 기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567面
  • 韓國國民黨 靑年團 任命狀
  • 3개국 군대생활로 조국에 이바지한 모세·李씨(1968 발간추정)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45面
  • 功勞褒賞推薦書(朴始昌·金弘壹·朴英俊·安椿生, 1964. 8)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충천 이모세(李模世, Moses Lee), 이마서(李摩西) 미국 하와이 -
본문
1912년 4월 11일 미국 하와이에서 이학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모세(李模世, Moses Lee), 이마서(李摩西)를 사용하였다. 미국 유타주 주립대학인 유타(UTAH)대학을 다녔다. 유타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3년 5월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받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 난징(南京)에서 한국특무대독립군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특무대독립군은 김구(金九)의 사적 조직으로, 일명 ‘김구구락부’라고도 불린다.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던 과정에서 김구 계열과 지청천(池靑天) 계열 학생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이때 김구는 자기 계열의 학생들을 난징으로 철수시켰고, 난징으로 철수한 염신배(廉信培)·이순보(李順甫)·마초군(馬超軍) 등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입교생인 나태섭(羅泰燮)·안춘생(安椿生)·고시복(高時福) 등이 1934년 12월 별도의 조직으로 결성한 것이 한국특무대독립군이다. 한국특무대독립군은 안공근(安恭根)이 관리하였다. 안공근은 특무대독립군 대원들에게 이봉창(李奉昌)·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다룬 󰡔도왜실기(屠倭實記)󰡕를 통해 특무활동을 교육하는 한편 󰡔동아일보󰡕,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과 각종 영자(英字)신문을 분석하여 세계정세와 혁명운동을 교육하였다. 이때 이마서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영자신문 분석을 담당하였다. 1936년 7월 안춘생·노태준(盧泰俊)·김동수(金東洙)·이재현(李在賢)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의 전위조직 한국국민당 청년단을 결성하고, 그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안공근이 조직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단원들에게 불만을 사게 되었고, 이로 인해 관리자가 엄항섭(嚴恒燮)으로 바뀌게 되었다. 엄항섭은 단원들을 상하이·광저우(廣州) 등지로 파견하여 조직을 확대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선전활동을 위해 기관지로 󰡔한민(韓民)󰡕을 발행하였다. 각종 영자신문과 중국신문 등을 번역하며, 기관지 발행을 도왔다. 기관지에 직접 글을 써서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6년 5월에 발간된 󰡔한민󰡕 제3호에 ‘리모세’라는 이름으로 「무장(武裝)을 준비하자」는 글을 발표한 것이다. 이집트의 아비시니아가 이탈리아에 대항하며 싸우는 것을 예로 들면서, 우리도 ‘임시정부를 절대 옹호하고 한국국민당의 영도 하에서 굳게 단결하여 무장하고 우리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1938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활동 중 말라리아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미·일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1944년 미국 공군에 자원입대하였고, 미군 제7공군에 배속되어 대일전쟁을 수행하였다. 일제가 패망한 후 퇴역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미군에 자원입대하였다. 미국 극동군 총사령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며 포로송환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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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외소재 미국 하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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