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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960394
성명
한자 金龍中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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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00 훈격 애족장
1940. 12. 29 대한인(大韓人) 국민회(國民會) 제5차 대표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상무위원회 선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1942년 1월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 선전과 과장이 되어 특파원으로 주미외교위원부 당국과 전시동포안녕보장을 협의하기 위하여 워싱톤으로 가서 동정을 관찰, 보고하고 동년(同年) 9월에는 할리우드 라디오 방송에서 임정승인과 무기지원 요청에 관한 방송연설을 했고 1943년 한국문제연구소를 창립, 기관지 『한국의 소리』를 발간, 각국의 정책담당자들과 한국독립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그외 1919년부터 1943년까지 수십차례에 걸쳐 독립금을 헌납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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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충남 금산(錦山) 사람이다.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한 그는 학문 연마를 통해 실력을 양성한 후 이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라는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권유를 받고 하바드대학, 남가주대학, 콜롬비아대학 등에서 수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역량을 쌓았다. 그리하여 1940년 12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제5차 대표대회에 몬타나지방 대표로 참가하여 중앙상무위원회 선전위원에 선임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합성협회(合成協會)가 발전적으로 통합한 국민회(國民會)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탄생한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중앙총회 아래 북미 . 하와이 . 멕시코 . 시베리아 . 만주 등지에 지방 총회를 설치하였으며, 다시 지방총회 아래 116개의 지방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서 민족통일운동과 독립운동 강화라는 중대 임무를 띠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어 하와이 호놀룰루에 의사부(議事部), 미주 로스엔젤레스에 집행부를 두었다. 김용중은 동 위원회의 집행부 선전과장에 선임되어 대서방 외교활동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았다.

그는 워싱턴에 주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와 협조하며 태평양전쟁 하에서 재미동포들의 신분보장과 미국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42년 2월에 개최된 한인자유대회를 준비하고 동 대회에서 단합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등 활동하였다. 이어 3월에는 뉴욕에서 개최된 26개국 동맹원탁회의에 참가하여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같은 해 9월 17일에는 할리우드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2주기를 맞아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1943년 한국문제연구소를 창립하고 기관지로 『한국의 소리』를 간행하며 미국 정관계 및 국제기구의 요인들에게 한국의 실상과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미국 전쟁공보국에서는 그에게 대한국인 방송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자 미국의 대표적 신문인 「워싱턴포스트」지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한편 그는 1919년 이래 광복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 옵서버로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하는 등 한국의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인자유대회(1942. 2. 27∼3. 1)
  • 미전쟁공보국 서신(1943. 12. 8, 12. 28, 12. 29)
  • 미대통령 영부인 루즈벨트여사 서신(1943. 11. 23, 1946. 10. 28)
  • 뉴욕공립도서관 서신(1943. 12. 3)
  • 워싱턴대 서신(1944. 1. 28)
  • 미 비상기획청 서신(1944. 4. 18),
  • 미국무성 서신(1944. 2. 1, 1945. 6. 23, 9. 11, 10. 4, 11. 1, 12. 4)
  • 주미포르투칼대사관 서신(1944. 6. 22)
  • UN 그리스대표 서신(1945. 5. 24)
  • UN 동아시아국장 서신(1945. 5. 17)
  • UN 영국대표 서신(1945. 5. 19)
  • 미국하원의원 럼케 서신(1944. 8. 12)
  • 자필이력서 내용
  • 전쟁공보국 서신(1943. 11. 23, 11. 24, 1944. 2. 11, 1945. 5. 18, 6. 1, 9. 26, 10. 10)
  • 주미중국대사관 서신(1943. 12. 4, 1944. 6. 22)
  • UN 호주대표 서신(1945. 5. 12)
  • UN 프랑스대표 서신(1945. 5. 22)
  • 新韓民報(1919. 5. 20, 1936. 12. 17, 1938. 5. 4, 9. 15, 1939. 12. 28, 1940. 1. 25, 11 .7, 1941. 1. 2, 1. 9, 2. 6, 2. 9, 2. 27, 6. 26, 1942. 1. 1, 3. 12, 4. 23, 6 .18, 9. 17, 10. 21 (영자판), 1943. 1. 14, 2. 18, 6. 10, 6. 24)
  • 이승만 서신(1944. 1. 31)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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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용중 - 충청남도 금산(錦山) 한인자유대회, 샌프란시스코회의
본문
1898년 3월 2일 전라북도 금산군(錦山郡) 금산읍(錦山邑) 중도리(中道里, 현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에서 아버지 김일택(金逸澤)과 어머니 박순화(朴順和)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에서 활동하였다.유년 시절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16년 10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간 후 여운형(呂運亨)의 주선으로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0년 4월 6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한인유학생총회 발기에 참여하였다. 1921년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로 와서 어학학교인 센추럴 주니어 하이스쿨(Central Junior High School)를 거쳐 로스앤젤레스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 4월부터 고향 선배이자 어학학교 동기인 송철(宋哲)과 채소와 과일 위탁 판매 사업을 벌였으며, 1927년 가을 하버드대학교(Havard University)에 진학하였다.이후 1928년 5월, 송철과 함께 ‘케이 앤드 에스 자버(K & S Jobber: 김용중·송철 과일채소 도매상)’를 설립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중부 캘리포니아California주 리들리(Reedley)에서 과일 농사와 판매로 성공한 김형순(金衡珣)·김호(金乎)와도 사업 동반자이자 독립운동 동지가 되었다.1939년 12월 20일, 한인청년 2세들과 내지한재구제회(內地旱災救濟會)를 결성하여 국내동포들을 돕고자 하였다. 『신한민보』 영문란의 주필로 활동하며 한인청년 2세의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였다. 1939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에 선임되어 1943년까지 선전·홍보활동을 맡았다. 한편 1941년 4월 미주 한인 연합단체로 결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의 집행부 위원 겸 선전과장에 선임되었다.또한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임시위원으로 선임되어 한인들의 안전 확보에 힘쓰며 미국정부의 대일전에 협조하였다. 1941년 12월 11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Los Angeles Times)에 「일본은 언제 만족하게 될 것인가When Will Japan Be Satisfied」 라는 글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이어 1941년 12월 29일 이승만(李承晩)이 워싱턴(Washington D.C.)의 라파예트 호텔(Lafayette Hotel)에서 개최한 한인자유대회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였다. 한인자유대회에서는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과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1943년 8월 1일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대미(對美) 외교활동을 위한 홍보 담당 요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대한인국민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외교 실패’ 문제로 이승만의 소환을 의결할 때 이에 찬성하였다. 이어 같은 해 10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워싱턴에 설치한 외교사무소 선전활동 담당으로 선임되었으나, 실제 활동은 위원장 김원용(金元容)과 선전부장 전경무(田耕武)만으로 이루어졌다.1943년 11월 자비로 ‘한국사정사(Korean Affairs Institute)’를 설립하였는데, 한국의 문화와 사정을 국제 사회에 알려 한국인과 연합국과의 친선을 도모하며, 연합국의 전쟁 승리를 도와 한국의 독립을 돕는다는 목적이었다. 그 해 11월 22일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라는 반(半) 월간의 영문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여 1961년 3월까지 발간하였다.1944년 9월 15일, 캐나다 몬트리올(Montreal)에서 개최되는 국제연합구제부흥회(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 UNRRA)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로 참가 자격을 얻었다.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가 열리는 시점에는 ‘얄타 밀약설’이 퍼지자, “한국의 독립을 해치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글을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편집장에게 보냈다. 같은 해 김호와 함께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해외한족대표단(海外韓族代表團)의 통합을 위해 5월 1일 공동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교섭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5월 8일 통합기구의 명칭을 ‘한인대표단’으로 정하고, 이승만과 한시대(韓始大)의 공동대표 명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1945년 광복 직후 한국사정사와 『한국의 소리』를 통해 한반도의 자주적인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7년 6월 한국을 방문하고, 7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75년 9월 6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여 안장된 뒤, 2000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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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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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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