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남해(南海)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가 전개될 때 적극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2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고 하며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3년 금릉대학(金陵大學)을 졸업하였다.
그후 김동우는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興士團) 단원으로 활동하며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에 앞장서는 한편 자신도 꾸준히 인구세·의무금·국민부담금·광복군후원금·국방공채·독립금 등을 출연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는 1937년 12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상항지방회(桑港地方會) 서기 및 지방대표에 선임되어 국치기념일(國恥記念日), 순국선열기념식(殉國先烈記念式) 등을 주도하였으며, 1941년 이후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집행위원, 서기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뜻있는 미주의 한인들은 이때를 조국 독립의 기회로 포착하고 무력 양성을 위한 계획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집행부는 한인국방군 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하고, 로스엔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로서 맹호군(猛虎軍)을 창설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계획을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알려 1942년 2월 정식 인준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맹호군의 상항지대원(桑港支隊員)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寫眞(1942. 4. 5, 1943. 1月)
- 新韓民報(1923. 4. 5, 1925. 4. 16, 4. 25, 10. 29, 1926. 4. 1, 4. 25, 1929. 12. 5, 1931. 1. 8, 1932. 2. 11, 1933. 3. 5, 1934. 1. 4, 9. 6, 1935. 11. 21, 12. 19, 1936. 8. 19, 1937. 2. 4, 11. 25, 12. 16, 1938. 2. 10, 9. 15, 1939. 7. 13, 1940. 1. 10, 2. 29, 3. 14, 5. 16, 10. 31, 1941. 1. 9, 4. 10, 7. 16, 11. 10, 1942. 1. 1, 2. 12, 3. 5, 4. 16, 5. 7, 6. 18, 6. 25, 8. 13, 8. 18, 9. 13, 10. 29, 1943. 4. 29, 9. 2, 11. 4, 11. 25, 1944. 2. 28, 12. 28)
- 韓國日報 桑港版(1988. 8. 30)
- 東亞日報 桑港版(1987. 2. 25, 1988. 8.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