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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282
성명
한자 朴昌雲
이명 Ramon Park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1 훈격 애족장

관련정보


2024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7년 대동보국회 발기인, 1916년 대한인국민회 멕시코 메리다 지방회 외교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1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대한인국민회 쿠바 마딴사스 지방회에서 활동하였고, 1924년 6월․1929년 8월․1930년 1월1931년 2월에는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1941년 하와이에서 조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집행부 미주지방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금 78원 78전을 지원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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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박창운은 1907년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1916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멕시코 메리다 지방회 외교위원으로 활동한 데 이어, 1921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대한인국민회 쿠바 마딴사스 지방회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민성국어학교의 교비 마련에 진력을 다하였다.

1924년 6월과 1929년 8월, 1930년 1월, 1931년 2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쿠바 마딴사스 지방회 회장으로, 1941년에는 하와이에서 조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집행부 미주지방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모두 78원 78전을 독립금으로 지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新韓民報(1910. 6. 1, 1911. 5. 3, 1921. 10. 20, 1923. 3. 22, 1924. 6. 26, 1927. 4. 14, 1928. 2. 9, 1929. 4. 4)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창운 멕시코명 : 박 라몬(Ramon Pack) 서울 -
본문
1889년 1월 21일(음력 12월 17일) 서울 야주현(夜珠峴, 당주동과 신문로 1가에 있던 고개)에서 태어났다. 『신한민보』 기사에는 출생년도가 1887년생, 원적이 경기 고양군(高陽郡)으로 보도되었다. 멕시코에서 사용한 이름은 박 라몬(Ramon Pack)이다. 1910년 1월 26일 멕시코 메리다에서 현항건의 딸 현귀봉(후에 현미숙으로 개명, 멕시코명 현 후아기나)과 결혼하여 6남매를 두었다. 메리다지방회장을 지낸 장덕천이 수양아버지이며, 매부는 임병일, 처남은 현영환이다.1905년 4월 4일 1,033명의 한인들과 함께 멕시코로 이민하여 4월 12일에 멕시코에 첫발을 내딛고 에네켄농장에 배치되었다. 4년간 혹독한 노예생활을 하였다. 1909년 11월 국민회(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재정 곤란 소식이 전해지자, 멕시코 저우망 경찰소(지방회보다 작은 단위의 조직) 한인들과 함께 24페소 50전을 의연하였다. 1911년 4월 백한성(白漢成) 등 9명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1915년 4월에는 잇신깝 농장에서 노동하였다. 1917년 메리다지방회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그 해 1월 메리다지방회가 한인 아동들의 국어 교육 등을 위해 해동학교를 설립하자, 3월 해동학교 재정 후원을 위해 135명과 함께 유지동맹원이 되어 동맹금을 기부하였다. 같은 해 4월 메리다지방회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中央總會) 회장 안창호(安昌浩)를 멕시코로 초빙하기 위해 회원들을 대상으로 초청 여비·환영비·귀환여비를 모집하자, 환영비 10달러, 회환여비 15달러 등 25달러를 기부하였다.그 후 멕시코혁명 등으로 한인들의 생계가 위험에 처하자, 노동주무원으로 한인들의 보다 좋은 일자리를 찾아 1921년 3월 200여 명의 한인들과 쿠바로 이주하였다. 이후 쿠바에서 평생동안 노동주선인으로 활동하였다. 3월 25일 마나티 지방에 도착하였으나 일자리를 마련할 수 없게 되자, 한인들의 노동 주선과 생활 안정을 위해 자신이 저축한 돈 몇 백 원과 김세원(金世元)의 수 백 원을 합하여 공동생활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김세원과 노동교섭위원으로 선정되어 마탄사스(Matanzas) 지방의 독일인 회사와 교섭하여 에네켄 농장에 300여 명의 일자리를 마련하였다. 이에 6월 마탄사스로 집단 이주하여 평생을 살았다.마탄사스 이주 후 아바나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한인들에게 일본 재외국민으로 등록할 것을 강요하자, 등록을 거부하고 한인 대표기구 조직 차원에서 1921년 6월 14일 쿠바지방회를 설립하였다. 쿠바지방회는 곧 마탄사스지방회로 개칭되었다. 1921년 10월 마탄사스지방회의 자치제도를 마련하고 지방회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한인들의 노동 주선과 생활 안정 등에 주력하였다. 1922년 1월 법무원 이윤근이 사임하자 후임 법무원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3월 삼일절 경축식 행사에서 군제 편제로 행렬할 때, 청년 대표로 참가하는 한편, 경축 전례식에서 스페인어로 연설하였다. 그 해 10월 쿠바 재류 중국인들이 신해혁명(辛亥革命) 기념식을 거행하자, 회장 김치일 등 임원들과 함께 참석하여 한인 대표로 축사하였다. 같은 해 12월 국민회 총회의 요청에 따라 지방회원들과 함께 본국 수재(水災) 구제금 25달러를 모아 송금하였다. 1924년 4월 마탄사스지방회 외교원 박덕만이 사임하자, 후임 외교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6월 궐석이 된 회장 선임시 다시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 지방회 통상회를 열고 지방회관을 건축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김치일·서병학과 건축위원으로 선정되었다.1925년 마탄사스지방회 임원 선출시 외교원으로 선출된 후 1928년까지 4년 연속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회장 김치일과 함께 「국민회의 역사」란 주제로 강연한 이래 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민회 창립기념식, 삼일절 기념식, 국치기념식 등에서 연설과 강연을 통해 한인의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같은 달 지방회원들과 기근구제금 23달러 60센트를 수합하여 국민회로 송금하였다.1926년 5월에는 쿠바 일본영사의 간섭을 물리치고 신한민을 선언하는 등 한인사회의 자유운동을 펼쳐 쿠바 한인사회의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달에는 마탄사스에서 한인 생활 안정을 위해 합자상업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선출되는 한편, 취리부(取利部) 재무도 담당하였다. 그해 8월에는 한인 2세를 위한 교육기관인 민성국어학교 교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쿠바 중국인들이 교민당을 조직하자, 회장 이세창 등 5명과 함께 참석하여 기념식을 치하하였다.1927년 4월에는 쿠바 한인의 생활 안정을 위해 임천택(林千澤)과 함께 멕시코 유카탄으로 건너가 협의하기도 하였다. 1928년 8월 민성국어학교 교장 박두현이 사임하자, 후임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11월 1929년도 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자, 민성국어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1929년 1월 지방회 회장으로서 한인들의 생활 구제를 위해 자본금 500달러로 구제상점을 설립하였다. 그해 5월 26일 쿠바 대통령이 미탄사스 지방을 순행하자, 카르데나스지방회와 연합하여 대통령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10월에는 후일 독립전쟁에 사용할 독립금 300달러를 저축하였고, 11월 민성국어학교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10년간 지방회를 위해 공익적으로 헌신하는 한편, 막심한 생활난에도 인구세·의무금·신문대금·3·1기념금·독립의연금 등 각종 납세 의무를 실천하고 민성국어학교의 교비 기초를 완전히 세우는 등 국민회와 교육기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1930년과 1931년에도 회장으로 선임되어 3년 연속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2월 국내의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임시특별회를 개최하여 학생운동 후원금을 모집하는 한편, 의무금을 기부하여 총 40달러를 송금하였다. 그해 3월 민성국어학교 교장 이세창이 사임하자, 후임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5월에는 메리다에서 별세한 모친의 유해를 쿠바로 모셔오기 위해 메리다를 방문하였다. 같은 해 6월 1일 장인환(張仁煥) 의사의 별세소식을 국민회 총회 공문으로 접하고, 마탄사스지방회 주최로 추도회를 열고 개회와 추도사를 하는 한편, 기부금 20달러 25센트를 모아 송금하였다.1931년 5월에는 카르데나스의 천도교(天道敎) 쿠바 종리원 임원들이 포덕(布德)차 마탄사스를 방문하자 마탄사스에 면 종리원을 신설하고 종리사가 되었다. 1932년 1월 민성국어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2월 국민회 총회의 명령에 따라 연합회와 협동하여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임원을 선정하자, 사무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8월 지방회 외교원으로 쿠바에서 외국인 남자 1인당 인구세 1원 45전씩을 납부하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쿠바 유력 신문에 쿠바 한인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리는 한편, 외교로서 교섭하였다. 1933년도 지방회 총무로 선출되었으나, 1933년 6월 총무직을 사임하였다. 1934년 2월 지방회 평의원장으로 선임되었고, 10월 국민회 총회의 주문으로 한국의 수재(水災) 한인을 위한 구제금 10달러를 모아 송금하였다. 같은 달 쿠바 육군장관의 한인촌 순행과 농장주 접대 등을 통해 쿠바 정재계 인사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여 한인사회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였다.1935년 1월 마탄사스지방회 평의원회에서 청년 남녀들의 교육을 위해 야학·체조·교련 등에 관한 규칙 제정위원을 선정하자, 이승택·김성재·장영기와 함께 제정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10월 마탄사스지방회는 그동안의 한인사회와 지방회, 국어학교 등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신한민보』를 통해 감사를 표하였다. 그해 12월 민성국어학교의 1936년도 임원 선정시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3월 마탄사스지방회에서 그동안 활동이 중지된 청년학원을 지방회 청년부로 개칭하고 부활시키기로 의결하자, 임천택과 함께 청년부 조직과 조례 등을 위임받아 청년부를 조직하는 한편, 청년부에 야학 개설, 체조 및 군사훈련, 강연회·토론회·동화회·독서회 등을 통해 청년부 활동을 강화하였다. 그해 12월 국민회 신헌장에 의거하여 차기년도 임원을 선정할 때 교육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쿠바가 경제공황으로 인한 생활 곤란과 유행병 창궐 등으로 위기를 겪자, 지방회 회원들과 함께 회원 1인당 1원 50전씩 모집하여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7년 3월 쿠바정부가 구제를 목적으로 각지에 자선물품을 보내도록 명령하자, 지방회 회원들과 각 1원씩 총 45원을 모아 송금하였다. 1939년 2월 마탄사스 시군부가 자선구제대회를 개최하고 마탄사스지방회의 참가를 요구하자, 당시 선전위원으로 총무 임천택과 함께 자선구제대회 설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1940년에도 선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10월 한중(韓中) 합작으로 광복군 축하식을 거행할 때, 축사를 하였다. 1941년 지방회 선전위원으로 3년 연속 당선되었고, 그해 1월 민성국어학교 교장으로 재차 선임되었다. 1941년 3월 쿠바정부가 외국노동자 배척을 위한 노동법을 만들어 시행하면서 외국인에게 노동을 허락하지 말 것을 명령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120여 명의 한인들과 특별회를 열고 쿠바에 입적을 결의하였다. 그 해 4월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에 의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설립되자, 이순여·안인식·임천택과 함께 미주지방위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 후원과 외교·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6월 마탄사스에서 일자리를 잃은 한인들을 위해 회사 측과 교섭하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다시 아바나로 가서 농장주들과도 교섭하였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해 8월 아바나에서 중국인 항공연합대회의 참가 요청을 받자, 마탄사스지방회를 비롯하여 아바나지방회·카르데나스지방회와 공동으로 한인연합회를 구성하여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 한인연합회 대표로 스페인어로 연설하였는데, 이 연설은 라디오 방송과 아바나의 중국인 신문 『개명공보』에도 게재되었다 .한편, 1941년 3월부터 마탄사스 에네켄회사들이 정부의 명령으로 한인의 노동을 금지하였던 탓에 9월 소송으로 다시 노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6개월간 생계를 꾸릴 수 없게 되자, 120여 명의 한인들을 위해 부인과 함께 여러 차례 돈과 음식을 마련하여 해결하였다. 또한 1929년에 독립금으로 저축한 300원에 대한 연이자 18원씩 7년 간 126원을 지방회 경비로 사용하였다.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습격 소식 이후 쿠바 국방위원장 다아스 벨송이 쿠바의 일본인 구역과 인명을 발표할 때 한인도 일본인으로 취급하였으며, 마탄사스농장을 일본인 정탐의 중심지라고 발표하였다. 이에 8일 마탄사스지방회에서 긴급 회의를 열고 한인의 안녕 보장을 위한 대책을 논의한 후 신임 집행위원장 이승택과 함께 대표로 선임되어 대외 선전을 준비하였다. 같은 달 23일 마탄사스지방회 특별회를 열고 아바나·카르데나스 지방회와 연합하여 아바나에 임시 외교부 기관을 설치할 것을 의결하였다. 또한 쿠바 대통령을 비롯한 사법성·외무성·노동성·경찰부장 등과도 교섭하여 한인에 대한 신임을 얻어내기도 하였다.1942년에도 지방회 선전위원으로 선정되자, 그해 1월 4일 지방회 통상회 결의로 재큐한족연합외교회 조직과 행정 체계를 설명하기 위해 임천택과 함께 아바나지방회와 카르데나스지방회로 파견되었다. 6월에 침략국타도회 주최로 하바나에서 대회가 개최되자, 이승택과 함께 한인 대표로 참가하였다. 같은 해 11월 하바나의 침략국타도회 주최로 소아국경축하대회가 열리자 이승택·임천택과 함께 한인 대표로 참석하였다.1944년 마탄사스지방회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1월 마탄사스지방회 연종대회서 명년도 선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5년 7월 하바나에서 열린 재큐한족단 대표회에서 명년도 재큐한족단 부단장으로 선임되었다. 이처럼 쿠바에서 지방회 창립, 민성국어학교 설립 등 한인 구제와 2세 교육, 광복 사업에 평생 매진하였다. 1962년 4월경 부인과 함께 쿠바에서 하와이를 방문한 것이 현재 확인되는 마지막 기록이다. 김구(金九)의 『백범일지』에는 임시정부를 후원한 쿠바의 대표 인사로 임천택과 함께 적혀있다.1918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대표회 경비로 1원, 국민의무금으로 11회 50원 50전, 인구세로 9회 9원, 대일전선통일동맹 특연금으로 1원, 3. 1기념금·3. 1적립금·3. 1금으로 3회 80전, 국민부담금 4회 5원, 광복군 후원금으로 3회 4원 98전, 독립금으로 6회 6원 50전 등 독립운동자금으로 78원 78전을 후원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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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소재지
국외소재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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