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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3월 12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조천읍(朝天邑)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부장환(夫章煥)의 친형이다. 이명으로 요시다(吉田), 대도덕환(大島德煥)을 사용하였다. 고향의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20세가 되던 해인 1927년 9월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다. 도항 목적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앞서 오사카로 건너가 피혁공장에 취업해 있던 작은아버지 부병각夫秉格의 부름으로 돈을 빌고자 오사카행을 택한 것으로추정된다. 이후 피혁 공장 등에서 일하였다.일제에 항거하기로 마음먹고 본격적인 운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31년 6월 무렵부터였다.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화학산업노동조합(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化學産業勞動組合) 오사카지부에 가맹하였다. 이 단체는 일본지역 최대 한인 노동단체인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이 해산한 후 만들어졌다. 제주도 조천읍 출신 노동운동가 김문준(金文準)은 오사카조선노동조합 회원들을 이끌고 이에 합류하였다. 따라서 이 조합은 일본의 단체이긴 했지만, 회원은 주로 한인이었다. 특히 고무, 피혁공장에서 일하는 제주도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제의 숱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임금차별 철폐와 노동시간 단축 등 동포들의 노동환경 개선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일본인의 차별 대우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려면 독립이 필수라는 생각을 공유하며, 파업과 시위는 물론 민족의식 앙양을 위한 교육활동, 국내 독립운동 지원을 위한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같은 고향 선배들의 지휘 아래 남(南) 지구 가두분회(街頭分會)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주로 한인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가에서 그들을 선전·선동하는 임무를 맡았다. 만주사변을 비롯한 일제의 전쟁 행위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제작·살포하였고, 일본인들과 긴밀한 협의 끝에 반전데이를 지정해 동시다발적인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의 권익 옹호를 위해 설치된 실업자위원회 준비회(失業者委員會 準備會)에 가입하고 『실업뉴스』를 집필·배포하였다.그밖에 1932년 7월 구로스미 쓰요시(黑住剛)의 추천으로 일본공산청년동맹 관서지방위원회(日本共産靑年同盟 關西地方委員會)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에는 재일본조선청년총동맹(在日本朝鮮靑年總同盟) 해산 후 새로이 합류한 다수의 한인 청년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김병옥(金秉玉) 책임의 오사카 남부지구에 소속되어 손용근(孫鏞根)·최성칠(崔成七)·최상철(崔相喆)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본부 지령에 따라 국치일인 8월 29일에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약탈의 날에 전조선노동청년에게 보냄」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각지에 살포하였다. 그 내용은 “토지와 집을 빼앗겨 일본에 건너 온 조선의 노동청년이 헐값에 혹사당하며,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자”, “1925년 조선공산당을 조직한 선배들의 뜻을 이어 반제국주의투쟁을 전개하자”, “일본공산청년동맹의 친구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재건하여 공동의 적 일본천황제 타도를 위해 헌신하자”라는 것이었다. 또한 공장 내 노동청년에게 비밀리에 공산주의 이론을 교육·선전하고, 청년 동지를 규합할 목적으로, 화학산업노동조합 내부에 공산청년동맹 프랙션을 구성해 활동하였다.1933년 2월 27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당초 노동조합 활동 관련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우연히 공산청년동맹 회원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어 그대로 구속되었다. 오사카지방검사국에 송치되어 같은 해 3월 29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약 1년여의 예심과 항소심을 거쳐 1934년 6월 18일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35년 5월 형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가출옥하였다. 열악한 수형생활 끝에 건강이 악화되다 가석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일제의 감시와 통제 속에 지냈으며, 1944년 7월 5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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