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회장에게 독립운동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1920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독립선언 경축식에서 임시정부 헌법을 낭독하고, 1923년 3월 메리다 지방회 삼일절 경축식에서 연설을 함.
미상 시기에 ‘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04년 11월 29일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그 뒤 다시 미주 본토로 건너왔다. 1910년 3월 오운(吳雲) 등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합자 형태의 회사인 권업동맹단(勸業同盟團)을 설립하자, 1914년 9월 동맹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3월 대한인국민회 산하 로스앤젤레스지방회(羅省地方會) 회장 이영수가 사임하자 2개월간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14일부터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가 개최되자, 동 지방회에서 대표 파견을 결의하고 대표 파견경비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국민회 북미총회 회장에게 독립운동을 위해 위국헌신(爲國獻身)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하였다.
1919년 8월에는 대한인국민회가 각지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파출소를 설치하고 위원을 임명하자, 로스앤젤레스 파출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구미주찰위원부(歐美駐紮委員部) 로스앤젤레스지방 공채모집위원으로 활동하며 공채표 발매 업무를 하였다. 1920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대한인국민회 총회의 독립선언 경축식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을 낭독하였다.
한편, 연도 미상 시기에 「신한국가(新韓國歌)」를 작사하여 안창호(安昌浩)에게 보냈다. 이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1923년 뉴욕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어 3.1절 기념식에서 연설하였다. 1923년 9월경 숨을 거두어 뉴욕 퀸즈매스패스 소재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1913년부터 1919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신한민보(新韓民報)(1914. 9. 24, 1916. 12. 7, 1917. 3. 22, 5. 24, 1918. 1. 10, 1919. 4. 15, 4. 22, 5. 1, 8. 30, 1920. 3. 23, 1923. 1. 18, 3. 22)
- 인터넷 미주한국일보(2012. 9. 7)
- 인터넷 연합뉴스(2015. 8. 11)
- 염세우가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연도 미상 1. 31, 독립기념관 소장)
- 우남이승만문서(雩南李承晩文書)(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동문편(東文篇) 제10권 31면
- 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5) 제3권 11면, 제4권 206면, 제7권 127면, 제9권 152면, 제12권 170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7) 제17권
- 이승만(李承晩) 동문서한집(東文書翰集)(연세대학교 출판부, 2009) 상(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