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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의 한계로 출신지는 확인할 수 없다. 『국민보』 기사에 따르면 1955년 사망 당시 77세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78년생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하와이 지방에서 여관업(rooming house)을 시작하여 한인여관업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백만장자 실업가로 이름을 떨쳤다. 부인은 서복수이며, 한인구제회 부장을 지냈다. 슬하에 딸 2명, 아들 3명, 손자 11명을 두었다.1909년 2월 북미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통합하여 미주 한인 최고기관인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자, 한인합성협회는 하와이지방총회(布哇地方總會)로 개편되었다. 국민회는 1910년 5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개칭되었다. 1910년 11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산하 하와이(Hawaii) 힐로(Hilo)에 위치한 비아노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1923년 1월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조직 개편(改編) 문제를 둘러싸고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국내의 이상재(李商在)·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 등은 해외 각 단체에 「경고(敬告) 해외각단서(海外各團書)」를 발송하여 임시정부 옹호 등 4개 조항을 제시하였다. 이 경고서를 받은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 거주 한인들은 같은 해 3월 11일 호놀룰루한인공동회(湖港韓人共同會)를 개최하고 「내지(內地) 경고서에 대한 공동회 발기문」을 작성·발표하여 임시정부 옹호 등 4개 조항 준수를 결의하였다. 이 공동회 발기문에 천여 명의 하와이 거주 한인이 서명하자, 오아후(O)’(ahu) 와일루아(Wailua) 지방 한인들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후 자료상 1937년까지 활동은 알 수 없다.1938년 하와이에서 이승만(李承晩)의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회원으로 활동하며, 재정 후원을 주로 하였다. 한편 같은 해 12월 호놀룰루에서 한길수(韓吉洙)의 외교 활동과 순행 강연을 후원하기 위해 민찬호(閔贊鎬)·차신호(車信浩)·최선주(崔善宙)·최창덕(崔昌德)·권도인(權道仁) 등과 함께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 Sino-Korean People's League Elects)을 창립하였다. 1939년 4월 당시 중한민중동맹단 재무로 활동하면서 워싱턴 D.C 대표 한길수, 회장 차신호, 부회장 최선주, 비서 최창덕 등과 함께 중한민중동맹단을 이끌었다. 1940년 2월 한인기독학원 찬성회 회원으로 찬성회 회의가 소집되자, 회장 김영순, 한인기독학원 원장 이원순(李元淳) 등과 함께 찬성금을 모집하며 2달러를 즉석 기부하였다.이후 1941년 6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위원장 이원순을 비롯하여 임원 조병요(趙炳堯) 등 임원들이 하와이 와히아와(Wahiawa) 지방에서 독립금을 예약 모집하자, 이에 자원하여 220달러를 후원할 것을 예약하였다. 1943년 8월 중한민중동맹단 다수가 탈퇴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하와이총지부를 창립하였으나, 중한민중동맹단에 남아 활동하다가 1943년 중한민중동맹단 임원 선출시 이사원으로 선출되었다. 1943년 10월 김성권(金聖權) 등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당원들이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기관지 『독립』을 발기하자 하와이에서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945년까지 활동하였다. 1944년 3월 하와이에서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총지부 통상회에서 부단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의사부(議事部)에서 임시정부의 훈전(訓電)을 실행하고자 하와이 각 단체 대표를 초청하여 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표대회는 대미한인외교기관 구성을 협의하기 위한 것으로서, 같은 달 18일 국민총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연합위원회 의사부장 안원규(安元奎)의 주최로 진행된 대표대회에는 하와이 8개 단체 24인 대표가 참석하였다. 이때 차신호 등과 함께 중한민중동맹단 대표로 참석하였다.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도 한인사회를 위한 의연금 기부 활동을 계속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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