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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2월 28일 전라북도 무주(茂朱)에서 태어났다. 선우학원의 인터뷰에 의하면 1896년 전북 정읍(井邑)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묘지명에는 1894년 12월 28일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본명은 한덕세(韓德世), 영어명은 데이지Daisy이며 결혼을 하면서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 이화학당 성악과 출신이다. 남편은 김형순(金� 珣, 2011·애국장)은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로서 김호(金乎)·김원용(金元容)와 함께 ‘리들리그룹’ 또는 ‘국민회의 3김’으로 불렸던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경 인천 내리교회(內里敎會) 목사 존스George Heber Jones(한국명 趙元時)의 중매로 유민원 통역, 하와이에서 6년간 통역 활동을 하다 귀국한 김형순과 결혼하였다. 이때 김형순은 재혼으로, 전처와 사이에 딸 동옥을 둔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남편이 홀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떠나자 국내에 남아 있다가, 1913년 8월 남편이 다시 미국에 간 후 가족을 초청하자 딸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백인 가정을 상대로 음악교습소를 운영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1916년 봄 남편과 함께 미국 과일·채소 농사의 중심지인 캘리포니아주 중부 지방의 리들리에 정착하여 묘목장을 설립하였다. 리들리묘목회사Reedley Nursery는 남편과 50 대 50의 부부 파트너로 등록한 동업 형태의 회사였다. 1918년 10월 3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산하 로스앤젤레스지방회에서 오늘날의 개천절에 해당하는 대황조단군탄강경축식(大皇祖檀君誕降慶祝式)에 참석하여 창가 「조국생각」을 독창하였다.
1921년경 이화학당 시절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던 스승 김호를 리들리로 모셔와, 자신의 주식 50% 중 25%를 그에게 주어 함께 사업을 시작하였다. 김호의 합류로 기존 묘목회사는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mpany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김형순 부부는 김형제상회 수입금을 기부하여 미주 한인 사회의 민족운동과 한인 생활 안정을 위한 최대의 자금 창구로 기능하였다.
1921년 12월 17일 김호·윤병구(尹炳求) 등 42인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다뉴바Dinuba에서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를 발기·조직하였다. 시사연구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조하려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개최에 반대하며 이승만(李承晩)을 지지하고자 설립된 단체였다. 또한 1921년 이후 다뉴바지방회에서 활동하며 동 지방회가 개최한 1921년 10월 단군대황조 성탄기념예식, 1922·1923·1926년 3·1절 기념식, 1929년 리들리에서 개최된 3·1절 기념식, 1930년 중가주지역 다뉴바·리들리·팔리어 지역 한인들과 연합 개최한 3·1절 기념식 등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국기가」 등을 독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가 일어나자, 5월 다뉴바·리들리·팔리어 등 4개 지역 지방회는 중가주 대한인공동회를 소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2월 윤봉길이 일제에 의해 총살당하자, 윤봉길의사 추도회에서 「윤의사의 시량리동가」를 부르며 추도하였다. 1936년 8월 29일 다뉴바한인교회에서 국치기념식(國恥記念式)이 거행되자 고국 노래를 독창하였다. 1937년 1월 5일 대한인국민회 제1차 전체대표대회가 개최되어 기존 회장제를 집행위원장 제도로 변경되는 등 새롭게 부흥하자, 남편과 함께 집행위원장 취임식에 참석하여 축하곡을 불렀다.
1938년 3월 중가주지방회 주최로 개최된 3·1절 기념식 후 다뉴바부인회 회장으로 독립군 장군복을 입고 대한부인독립군 1연대의 장쾌한 전시 활동을 연출하였으며, 같은 달 20일 도산 안창호 추도회에서 추도가를 부르는 한편, 추도문을 작성하여 헌사하였다. 같은 해 4월 남편과 김호가 건축 기금의 2/3을 기부하여 건축된 국민회총회관 낙성식에 참석하여 독창을 불렀다. 같은 해 남편과 함께 리들리 제이 스트리트J Street에 부지를 기증하여 1939년 리들리한인장로교회를 건축하게 하였고, 이후 40여 년 동안 운영비와 월급 등을 지원하였다.
1939년 2월 중가주지방회에서 개최한 국민회 창립 30주년 기념식, 3월 3·1절 기념식, 5월 순국선현추도식, 1940년 2월 리들리지방회에서 개최한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독창하였다. 같은 해 10월 중가주와 국민회 중앙부에서 거행한 한국광복군 축하식에서 「창검가」를 독창하여 독립군의 용기를 찬양하는 한편, 남편과 함께 광복군 후원금을 내기도 하였다.
1941년 중가주지방회가 개최한 3·1절 기념식에서 「국기가」를 불러 참석자들의 합창을 유도하였다. 같은 해 4월 미주 한인 단체의 연합기관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어 김호와 남편이 각기 집행위원장과 재정위원장에 선임되자, 이들을 뒷바라지하며 광복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재정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44년 3월 중가주지방회 주최의 3·1절 기념식에 남편과 함께 참석하여 독창하였고, 4월에는 다뉴바의 장봉선의 집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중가주지부를 창립하였다. 중가주지부 창립은 1919년 8월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이 조직된 후, 활동 부진으로 폐지되었다가 이때 다시 복설된 것이다. 1944년 10월 28일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총회관에서 전체대표회를 개최하였을 때, 한영숙·임인재·이초실·이성례 등과 함께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1년 10월 다뉴바에서 특별외교비 의연금 10달러를 낸 것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 후원금 2회 7달러, 3·1운동적립금 2회 7달러, 의무금 6회 70달러, 인구세 4회 13달러, 대한인국민회총회관 건축의연금 10달러, 국민회기본금 5달러, 광복군 후원금 5회 13달러, 국내한재의연금, 독립금 23회 160달러, 기본적립금 5달러 등 25년 동안 각종 운동 자금을 후원하여 재미 한인 사회의 발전과 민족운동에 공헌하였다.
1977년 5월 5일 사망하여 같은 해 1월 먼저 별세한 남편 김형순이 묻힌 리들리 공동묘지Reedley Cemetery에 합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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