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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4월 13일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청룡면(靑龍面) 초량리(草良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조성손(趙聲孫), 조성학(趙成學·趙性學)이다. 미국에서 황인성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을 두었다.
1907년 7월 말 공립협회(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하였고, 곧바로 임원회를 통해 사법원으로 선임되었다. 1910년 2월 국민회(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학무원으로 선출되었고, 6월 장인환(張仁煥)의 스티븐스 처단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된 공동회(共同會) 재무로 선임되어 업무를 보았다. 같은 해 7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려는 소식을 접한 북미지방총회에서 애국동맹단(愛國同盟團)을 결성하고 임원을 선정할 때, 회계로 선출되었다. 애국동맹단은 미국 등 열강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외교 선전과 군사인재 양성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과 무역을 위해 한미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11년 북미지방총회 법무원으로 활동하던 중, 6월 재무원으로 업무가 변경되었다. 1912년 4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서기 겸 재무로 선임되었고, 1913년 6월 서기로만 활동하였다. 1913년 1월 북미지방총회 재무 겸 학무원으로 선출되었고, 1914년에는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같은 해 2월 북미지방총회 대의원회가 개최되자, 대의원회 의장으로 캘리포니아주정부(加州政府)의 법인 인가를 얻을 것과 자치규정을 실시할 것 등 25개 사항을 의결하였다. 그리하여 4월 6일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50년간 북미지방총회를 자치기관으로 인정한다는 인허장을 받았다. 이처럼 북미지방총회가 한인자치기관으로 인가를 받자, 총회장 이대위(李大爲) 등 임원들과 임원회를 열고 회원의 의무와 권리, 자치규정 등을 인가함으로써 북미지방총회는 일본 신민이 아닌 국민회 회원으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북미지방총회에서 은행채 보상을 위한 발기자를 모집할 때, 8회 보상 발기자로 가입하였다. 1918년 7월 신한민보 식자 기계채 청장 의연 10회 동맹자로 가입하였다. 1919년 북미지방총회 법무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7월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국민회원 등록을 위한 파출소 위원을 선임할 때, 오클랜드 파출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적십자회 북미지방총회를 조직하고 사검(査檢)으로 선정되었다.
1920년 5월 23일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북미지방총회 제12차 대의원회에서 법무원으로 선정되었으나, 1921년 1월 사임서를 제출하고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0월 18일 농상주식회사가 설립되자, 자본금(股本) 모집위원이 되었다. 1926년 1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서 의무금과 신문대금을 걷기 위한 오클랜드지방 수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8년 1월 대한인국민회총회 총무로 선임되어 재만동포 옹호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였다. 같은 해 12월 1일 오클랜드지방회(玉蘭地方會)를 설립하고 서기로 선임되어 1939년까지 서기로 활동하였다. 1929년 1월 다시 국민회 총회 총무로 선임되었고, 이후 1931년까지 3년간 총회 총무로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샌프란시스코남감리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해 재정모집위원으로 선정되었고, 1930년 1월 국민회 총회 총무로 재선출되었다.
1930년 3월 총회 임원회에서 광주학생운동 후원을 결의하고 샌프란시스코 지방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국민회 총회 총무로 다시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10월 국민회 총회가 재미한인연합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각 지방에 선전부 설치를 독려하자, 같은 달 18일 오클랜드지방회에 선전부를 설치하였다. 1932년 1월 국민회 총회 재무로 선임된 이래 1934년까지 역임하였다. 1932년 4월 「일반 국민회원들에게」라는 글을 통해 국민회 재정을 위해 의무금과 『신한민보(新韓民報)』 대금을 납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 10월 중가주 대한인공동회가 리들리한인교회에서 개최한 이봉창 의사 추도회에서 「장하다 리봉창 의사여」라는 시를 헌사하였다. 1933년 1월 총회 재무로 연임된 데 이어 『신한민보』 재무로도 선임되자, 2월 16일 「회원 제국에게 경고」라는 글을 올려 국민회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1934년 2월 오클랜드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기념식 취지를 설명하였고, 5월 1일 순국선열추도회에서는 추도시를 낭독하였다. 1935년 1월 국민회 총회에서 전년도 임원을 그대로 유임하였으나, 재무를 사임하였다. 같은 해 2월 오클랜드지방회의 주최로 국민회 창립기념식이 개최되자, 국민회 역사를 강연하였고, 3월 3.1절 기념식에서 고 양세봉(梁世奉)·양하산(梁河山) 장군의 약력과 추도사를 하였다. 1936년 2월 오클랜드지방회가 개최한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축사하였다. 같은 해 7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최진하로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총회관 건축을 위한 오클랜드 지방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오클랜드지방회에서 임원 선출시 지방집행위원이자 서기로 선임되었다.
1937년 1월 황사용·김탁과 함께 국민회 총회 중앙감찰위원, 오클랜드지방회 1차 집행위원회에서 지방자치규정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오클랜드지방회에서 개최한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연설하였고, 5월 순국선현추도식에서 추도문을 낭독하였으며,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서 「국치역사와 국치조약」을 연설하였다. 같은 해 9월 다뉴바한인교회에서 중가주대회가 열리자 중앙감찰위원으로 참석하였다. 9월 16일 『신한민보』에 「원동시국과 우리 책임」이란 글을 실어 개인생활 향상, 지방단체 공고, 총회 당국 신임, 임시정부 옹호 등 4가지를 위해 중일전쟁을 계기로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국민회를 중심으로 군사상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달성할 것을 호소하였다. 1937년 국민회 총회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임되는 한편, 오클랜드지방회 집행위원이자 서기로 선임되었다. 1938년 3월 오클랜드지방회에서 주최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 추도회와 5월 1일 순국선현추도회에서 추도문을 낭독하였다. 1939년 3월 오클랜드지방회 주최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5월 1일 순국선현추도식에서 추도문을 낭독하였으며, 8월 29일 국치기념식에서는 연설하였다.
1940년 1월 북미한인학생회 회장과 국민회 총회 재무로 활동하는 한편, 이즈음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4월 신한민보사 식자기계 의연모집 위원회로부터 수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8월부터는 시카고에 머물렀고, 8월 29일 시카고지방회(芝城地方會)에서 국치기념식을 거행하자, 망국원인에 대해 통론하였다. 같은 해 10월 시카고지방회에서 광복군 축하식을 거행하자 북미한인학생회 대표로 축사하였다. 1941년 3월 국민회 총회의 영문잡지 원고를 장세운·장기원 등과 3인이 맡기도 하였다. 같은 해 4월 말 오클랜드한인교회 계삭회의 임원 선정시 탁사부에 배치되었다.
1907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의무금으로 265달러, 인구세로 7달러, 소득세로 18달러, 구제금으로 34달러 25센트, 의연금으로 193달러 25센트, 국민부담금으로 24달러, 광복군 후원금으로 5달러, 독립금으로 135달러, 자유공채 200달러, 동정금과 위로금으로 16달러 50센트, 삼일절 기념금으로 4달러, 장인환 의사 장례비로 5달러, 교회 건축비로 10달러, 국내 여학교 기부금으로 7달러, 국어교과서 편찬비 분담금으로 5달러, 신문대금으로 22달러, 충칭(重慶)지역 특파원 여비로 25달러 등 수 십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1961년 5월 30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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