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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4290
성명
한자 朴春三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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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6 훈격 건국포장
1909년 멕시코 메리다지방 공립협회 회원, 1917년 대한인국민회 멕시코 메리다지방회 법무원, 1923년부터 1925년까지 동 지방회 회장, 1925년부터 1929년까지 멕시코 푸론데라지방 국어학교 교사 및 교장, 법무원, 푸론데라지방회 부회장, 오부리곤지방회 부회장 및 회장 등을 역임함.

1930년 메리다 지방으로 이주하여 1935년까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총무, 재무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부터 메리다지방회 대표원을 역임함.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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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09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 회장, 푸론테라지방회 부회장, 오부리곤지방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09년 5월 9일 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조직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여 1917년까지 활동하였다. 1917년 메리다지방회 산하 산타나 경찰소 법무원, 1924년과 1925년 동 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푸론테라 지방으로 이주하여 국어학교를 설립한 뒤, 교장이 되어 한인 자녀들의 한글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6년에 이어 1928년 동 지방회 부회장,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즈음 푸론테라지방회는 오부리곤지방회로 개칭되었다. 1929년과 1930년 오부리곤지방회 부회장,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총무로 선정되었다. 1944년부터 1946년 3년간 동 지방회 대표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12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금, 임시정부 및 광복군 후원금, 군자금 등의 명목으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新韓民報(1912. 11. 4, 1917. 3. 1, 1918. 8. 1, 8. 29, 1920. 12. 30, 1921. 5. 5, 1924. 2. 14, 10. 23, 1925. 1. 1, 8. 20, 12. 31, 1926. 3. 25, 5. 27, 12. 2, 1927. 1. 6, 9. 22, 1928. 2. 9, 9. 27, 11. 8, 12. 20, 1929. 12. 12, 12. 26, 1930. 4. 3, 5. 8, 1932. 1. 7, 3. 17, 1933. 9. 21, 11. 23, 1934. 3. 15, 10. 18, 12. 13, 1935. 3. 14, 9. 5, 11. 21, 1936. 9. 17, 1937. 9. 2, 1938. 9. 22, 1940. 3. 14, 6. 13, 11. 28, 12. 26, 1941. 5. 22, 1942. 1. 1, 7. 9, 1943. 1. 21, 6. 3, 1944. 1. 20, 12. 28, 1945. 1. 11, 1. 18, 3. 8, 12. 13)
  • 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5) 제1권 411면, 제9권 44, 176, 631면, 제17권 384, 45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춘삼 - 경북 영덕 -
본문
1887년 (음)4월 2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남정면(南亭面) 상동(床洞)에서 태어났다. 멕시코로 향하는 배를 타고 1905년 4월 4일 인천항을 떠나 5월 11일 살리나 크루즈(Salina Cruz)항구에 도착한 1,018명의 한인 가운데 한명이었다.1909년 5월 멕시코 유카탄반도(有佳團道, Yucatan Peninsula) 메리다(美利多, Merida)에 정착한 후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국민회(國民會) 메리다지방회 회원으로 멕시코 한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미주 한인 지도자들이 안창호 등이 중심이 되어 1903년 9월 샌프란시코 지역에서 설립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를 확대 개편한 공립협회의 후신으로 하와이 한인협성협회를 통합하여 발족한 단체였다.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乙巳條約)을 체결하자, 멕시코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농장에서 노동하고 있던 한인들을 찾아와서 한국은 보호국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관할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격분한 한인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보호를 위해 국민회 지도부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1909년 국민회는 황사용(黃思溶)과 방화중(邦化重) 두 사람을 견묵(遣墨)위원으로 멕시코에 파견했으며, 이들은 멕시코 한인들을 대상으로 국민회 설립취지와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같은 해 5월 9일 메리다지방회를 조직하였다.1910년 2월부터 1916년까지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메리다지방회에서 일반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국민회 지도자들이 1910년 2월 10일에 장경(張景)·백일규(白一圭)·문양목(文讓穆) 등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있던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통합하여 미주 최대의 한인단체가 되었다. 그 결과 국민회 각 지방회는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로 명칭을 변경되어 국민회 메리다지방회도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였다. 1917년 1월 7일 메리다지방회는 통상회를 개최하여 산타나(Santana)지역의 경찰소에서 활동할 임원을 선정했는데, 서기 김억석(金億錫)·사찰 배태관(裵泰寬) 등과 함께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1924년 부회장 유인택(劉仁澤)·총무 변윤행(卞允行)·시기 겸 재무원 유진태(兪鎭台) 등과 함께 회장으로 선출되어 메리다 지방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1925년 메리다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프론테라(Frontera) 지역에서 운영되었던 국어학교가 재정문제로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교사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인2세대들의 정체성 유지와 구국교육(救國敎育)을 통해서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같은 해 8월경 프론테라 지역으로 옮긴 후 황명석(黃名石)을 대신하여 법무원으로 선정되었다. 1926년에는 회장 공인덕(孔仁德)·재무원 이춘근(李春根)·학무원 김태진·대의원 강경숙(康敬淑) 등과 함께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한인들의 항일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1928년 초반에도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회장인 이영순(李永淳)이 푸에르토(puerto)로 이거하자 회장으로 활동하였다.1929~1930년에는 회장 강경숙·재무원 김태진·학무원 하오성(河五星)·외교원 서정환 등과 함께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활동에 앞장섰지만, 수재(水災)로 인해서 농사를 망치고 멕시코 관인에게 집과 땅을 빼앗기자 멕시코시티(Mexico City)로 이주하였다.1934년 경제적 궁핍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메리다지방회에서 회장 유진태, 부회장 이학서(李學西) 등과 함께 총무로 활동하였다.1935년 지방회 총무로 활동했으며, 지방회 재정이 어려워지자 솔선하여 자금을 기부하면서 독립운동과 한인사회 유지에 열의를 보였다.1936년 5월 17일 김호(金乎)·이살음(李薩音)·송헌주(宋憲澍) 등 미주 한인 지도자들이 모여서 침체되어 있던 북미 대한인국민회 활동을 부흥하고자 원탁회의를 개최했으며, 여기서 기존의 회장제도를 변경하여 집행위원장과 각 위원제도를 도입하였다. 그 결과 멕시코 각 지방회도 제도를 변경하게 되었으며, 1944년부터 1945년까지 메리다지방회에서 집행위원장 김정식(金正植)·이학서 등과 함께 대표원으로 활동하였다.1912년부터 1945년 3월까지 의무금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그밖에 미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를 위한 후원금을 제공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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