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4177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申永一
이명 申永澈(徹)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7 훈격 대통령표창
1908년 미국 공립협회(共立協會) 솔트레이크지방회 회원, 1909년 동 지방회 회장, 1910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솔트레이크지방회 학무원 및 회장을 지냈으며, 1923년부터 1929년까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새크라멘토지방회 학무원, 실업부원, 법무원, 1931년 새크라멘토지방회 부회장을 거쳐 1941년 동 지방회에서 집행위원 및 선전위원 등으로 활동함.
1907년부터 1942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05년 하와이로 건너와 1년간 노동한 뒤, 미주 본토로 건너갔다. 1907년 4월 미주 공립협회(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에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같은 해 12월 솔트레이크시티(鹽湖市)로 이주하여 1908년 11월 9일 지방회를 설립하고 서기로 활동하다가 1909년 1월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08년 10월에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 발기인이 되어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이 회사는 공립협회가 블라디보스토크 등 원동(遠東)지역에 독립군기지 개척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었다. 1910년 대한인국민회 동 지방회 학무로 활동하였다.

1920년 12월 동명이인 관계로 영철에서 영일로 개명하였다. 같은 달 27일 새크라멘토에서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고 제124단우가 되었다. 1924년과 1925년 연속으로 새크라멘토지방회(朔都地方會) 학무에 선임되었다. 이후 동 지방회에서 1927년 실업부원, 1928년 학무, 1929년 법무를 역임한 뒤, 1932년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후 양찬관(洋饌館) 사업 부진으로 폐업한 뒤 활동이 중단되었다.

1941년 새크라멘토지방회 집행위원 겸 선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과 1942년 3.1절 기념식에서 각기 「독립운동사」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1907년부터 1942년까지 수십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공립신보(共立新報)(1907. 4. 26, 5. 10, 7. 26, 12. 20, 1908. 1. 22, 4. 1, 10. 21, 1909. 1. 27)
  • 신한민보(新韓民報)(1909. 3. 24, 4. 7, 4. 14, 5. 5, 5. 12, 8. 4, 8. 18, 10. 20, 11. 24, 2. 15, 1910. 11. 16, 1913. 7. 4, 1914. 9. 17, 1918. 10. 10, 1919. 7. 12, 9. 13, 1920. 8. 26, 12. 9, 1921. 1. 13, 3. 24, 4. 14, 9. 22, 10. 27, 11. 17, 1922. 11. 16, 1923. 1. 18, 4. 26, 11. 15, 12. 13, 1924. 7. 24, 1925. 3. 19, 8. 13, 8. 20, 1926. 7. 15, 9. 23, 1927. 1. 6, 3. 10, 1928. 1. 5, 1. 12, 3. 8, 3. 15, 3. 22, 5. 31, 6. 7, 8. 2, 10. 11, 1929. 1. 3, 2. 7, 3. 7, 3. 28, 5. 16, 1930. 3. 6, 8. 14, 1931. 11. 19, 12. 3, 1933. 3. 9, 1934. 2. 15, 1936. 7. 16, 1937. 3. 11, 6. 17, 9. 2, 9. 30, 10. 14, 1938. 7. 14, 10. 13, 1939. 3. 9, 7. 20, 1940. 3. 21, 3. 28, 10. 3, 11. 21, 11. 28, 1941. 3. 13, 4. 10, 10. 2, 1942. 3. 19, 10. 1)
  • 신한국보(新韓國報)(1910. 8. 9)
  • 도산안창호전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제10권 748면
  • 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5) 제1권 290, 335면, 제4권 157, 195면, 제9권 182면, 제10권 4면, 제15권 427, 432면 제17권 381, 450, 486, 495, 546면, 제19권 2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신영일 신영철(申永澈(徹)) 평남 숙천(肅川) -
본문
1880년 11월 6일 평안남도 숙천군(肅川郡) 우상면(右上面) 미남리(嵋南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신영철(申永澈)이었으나 영일로 개명하였다. 1905년 하와이로 가서 1년간 노동자로 일하였고, 다음 해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1907년 4월 미주 공립협회(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에 가입하였다가, 그해 12월 솔트레이크시티(鹽湖市)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1908년 11월 9일 솔트레이크시티지방회를 설립하고 서기로 활동하였다. 10월에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 발기인 중 한 사람이 되어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이 회사는 공립협회가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독립군기지를 육성하기 위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9년에는 지방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어 한인들의 단결과 항일의식 고취를 위한 활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1910년 공립협회가 국민회를 거쳐 대한인국민회로 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 솔트레이크시티지방회에 가입하여 학무를 맡아 활동하였다.1920년 12월 27일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Sacramento), (朔都)에서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여 제124 단우가 되었다. 1924년에서 1925년 연속으로 대한인국민회 새크라멘토지방회(朔都地方會)의 학무를 역임하였다. 이 지방회에서 1927년 실업부원, 1928년 학무, 1929년 법무를 맡아 일하였으며 1932년에는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1941년 새크라멘토 지방회의 집행위원 겸 선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 3·1절 기념식에서는 독립운동사를, 1942년 3·1절 기념식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처럼 지방회를 중심으로 하여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1907년부터 1942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신영일(관리번호:954177)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