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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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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正植
이명 金戊逢, 金戊鳳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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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5 훈격 건국포장
1911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신한동지방회(新韓洞地方會), 1912년 메리다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메리다지방회에서 1919년 법무, 1922년 회장, 1924년 서기 겸 재무, 법무원, 1925년 재무, 1927년 부회장, 1930년․1934년․1943년 총무, 1936년․1938년 감찰원, 1940년․1941년․1944년 집행위원장을 역임함.

1909~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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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2권(2016년 발간)

1911년부터 1945년까지 멕시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타바스코 신한동지방회(新韓洞地方會), 메리다지방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11년 타바스코 신한동지방회 회원, 1912년 메리다지방회 회원, 1918년 메리다 산하 넷방지방에서 반도학교를 설립하고 메리다지방회로부터 인준을 받아 회계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넷방지방경찰소에서 법무를 담당하였다.

1922년 메리다지방회 회장, 1924년 서기 겸 재무, 그리고 법무원, 1926년 재무, 1928년 부회장, 1931년 총무, 1934년 총무ㆍ평의원, 1937년과 1938년 감찰원, 1940년 집행위원장, 1943년 총무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부터 1942년까지 메리다지방회에서 3·1독립선언기념식, 국민회 창립기념식, 국치기념식, 광복군축하식 등에서 연설을 하였고,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新韓民報(1911. 3. 8, 1918. 1. 24, 10. 3, 10. 10, 11. 21, 11. 28, 1919. 1. 2, 1920. 4. 13, 1921. 12. 29, 1922. 2. 2, 11. 2, 1923. 2. 1, 3. 22, 4. 26, 11. 8, 1924. 4. 24, 11. 13, 11. 27, 12. 11, 1925. 2. 26, 9. 24, 11. 5, 12. 3, 1926. 3. 19, 3. 25, 11. 25, 1927. 1. 6, 12. 1, 12. 29, 1928. 8. 30, 1930. 1. 16, 3. 20, 4. 17, 11. 27, 1932. 1. 7, 2. 25, 3. 17, 1933. 3.16, 9. 21, 9. 22, 12. 28, 1934. 3. 15, 3. 22, 9. 13, 10. 18, 1935. 9. 5, 1936. 9. 17, 1936. 12. 10, 12. 17, 1937. 5. 20, 9. 2, 1938. 2. 10, 4. 14, 9. 22, 1939. 12. 21, 1940. 3. 7, 3. 14, 3. 28, 6. 6, 6. 13, 8. 29, 9. 26, 11. 28, 12. 12, 12. 26, 1941. 1. 23, 5. 22, 5. 29, 9. 11, 10. 2, 11. 6, 11. 28, 12. 11, 1942. 1. 1, 10. 22, 1943. 1. 21, 6. 3, 6. 10, 1944. 1. 20, 3. 30, 9. 28, 1945. 1. 18, 3. 8)
  • 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5) 제1권 353, 524면, 제7권 399면, 제9권 43, 632면, 제17권 548면, 제19권 19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정식 - 경기도 수원(水原) -
본문
1883년 3월 18일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매곡면동(梅谷面洞)이며, 수원군 삼동(三洞) 자라목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무봉((金戊鳳)·(金戊逢))을 사용하였다.1905년 4월 노예이민인 줄 모른 채 1,033명의 한인들과 함께 멕시코로 건너가 4년간 에네켄농장에서 노동에 혹사하였다. 4년의 계약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미주 국민회(國民會)의 도움을 받아 1909년 5월 조직된 멕시코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에 가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 타바스코(Tabasco)로 이주하여 1911년 신한동지방회(新韓洞地方會)를 설립하고 회원으로 활동하였다.1912년 다시 메리다로 돌아와 메리다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메리다지방회는 넷방지방 한인들이 한인2세들의 정체성과 독립의식 함양을 위해 반도학교 설립을 청원하자 이를 승인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교장 이기선, 교사 김성민(金聖民)과 함께 회계로 활동하면서 한인2세들의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1919년 넷방지방경찰소(지방회보다 작은 단위 조직) 법무원으로 취임하면서 「우리 장래의 발전」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1920년 메리다지방회에서 개최한 3·1운동 2주년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을 경축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1922년에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에는 서기 겸 재무원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고, 최정식(崔正植)을 대신하여 법무원으로서도 활동하였다.1925년 2·3·9월에는 메리다지방회 임원들과 함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창립 16주년, 3·1운동 기념식, 국치기념식을 주관하였다. 1926년에는 재무, 1928년 부회장으로 한인들의 독립운동 전개에 앞장섰다. 이후 1931년에는 총무로 선임되었다. 1933년 3·1운동 기념식에는 순서위원, 국치기념식에는 절차위원으로 선정되어 기념식을 진행하였으며, 1934년 지방회에서 평의원회를 조직하자 김경문·이철과 함께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총무로도 활동하였다. 1937~1938년에는 감찰원으로 선정되었다. 1940년에는 집행위원장으로서 3월에는 3·1운동 기념식, 6월에는 순국선현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버팀목중의 하나였던 이동녕(李東寧)의 죽음을 추도하는 기념식, 8월에는 국치기념식, 11월에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군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1941년 집행위원장을 연임하였다.1932~1945년 임시정부 후원금, 독립금, 광복군 후원금 등 총 274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후원하였다. 특히 1942년 9월 광복군을 위해 110원을 후원한 바 있다.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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