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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8월 12일 평안남도 증산군(甑山郡) 사현면(師賢面) 화선리(化善里)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의 숭실학교(崇實學校)와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수학하였으며, 1910년부터 1914년까지 농사감독의 일을 하였다고 한다.1914년 7월 25일 박인택·김전·김자민·김종덕·박선제·박영로 등 12명의 한인 학생들과 함께 몽골리아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주선으로 국민회가 운영하는 한인강습소 특별생으로 입학하였다. 1915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업랜드(upland, 일명 (上原) 또는 업플랜드))에 거주하면서 의연금을 기부하였고, 1916년 4월에는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에 거주하면서 국민회가 주관하는 학생양성소 중수(重修)를 위한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또한 7월 하기강습소를 유지하기 위한 의연금을 기부하는 등 한인강습소를 위해 노력하였다. 1917년 9월 대한인국민회에서 은행채 보상 발기자를 모집하자, 제4회 발기자로 자원하였다.1919년 1월 15일 미국 오하이오주 아크론에서 김윤각을 비롯한 황보정걸·조울림·강영상·하희옥·강영문·김원용·허진업·임초 등 동포들과 함께 한인임시회를 발기하고, 같은 달 16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에 지방회 설립을 청원하여 인가를 받았다. 오하이오지방회 조직 후 2월 1일 국민회 창립일을 맞이하여 경축식을 개최하고, ‘국민회와 우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이후 일리노이주 시카고로 이주하여 1919년 4월 시카고지방회 특별회에서 서기로 선출되어 회장 신형호(신규식의 조카), 총무 정태은, 법무 김경 등과 함께 지방회를 이끌었다. 이 시기 독립운동 후원을 위해 대표의연금·독립의연금·21례금·애국금·공채표 등 26달러를 후원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독립운동 의연록에 명단이 올랐다.1922년 2월과 3월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에서 쿠바와 멕시코의 한인동포를 구제하기 위한 구제금을 의연하였고, 11월과 1923년 10월 한국에서 발생한 수재(水災) 구제금을 기부하였다. 1923년 12월 30일 시카고 한인들과 강영소(姜永昭)의 집에 모여 시카고지방회의 간부를 조직할 때 구제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5월 최진하·백일규 등 국민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민립대학후원회취지서」가 발표되자, 북미민립대학기성후원회 발기인이 되어 후원하였다. 1926년 3월 1일에는 미국 사우트 빈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 주석으로 행사를 주관하였다. 9월에는 한인성과 함께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센추럴 푸드 프로덕스 컴퍼니(Central Food Products Company)를 설립하고 찹수이와 차우멘 등 중화요리 영업을 시작하였다. 1928년 봄 클리블랜드에서 오하이오 주정부로부터 주식회사 관허를 얻어 회사이름을 동양식물회사(Oriental Food Products Company)로 바꾸고 실업부장이 되어 사장 주영한, 재무 김정극과 함께 회사를 운영하였다. 같은 해 3월 1일 클리블랜드에서 오버린대학(Oberlin College)에 재학 중인 학생들과 합동으로 3·1절 기념식을 개최하고 추도식을 인도하였다. 1930년 3월 1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3·1절을 맞이하여 한국의 학생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집하는 한편, 기념식에서 국기가를 부르며 애국심을 고취하였다.1930년 11월 시키고지방회 통상회에서 1931년도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지방회 회장이 된 뒤 1931년 2월 1일 국민회 창립 22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주관하였고, 3월 1일 3·1절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같은 해 6월 시카고지방회 월례회를 개최하고 지방회의 재정 안정을 위해 강혜순·김배세 등과 함께 수금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메사추세츠주 보스톤으로 이주하여 1937년 2월 28일 저녁 박종안의 집에서 3·1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1937년 6월 김태술과 함께 근무하던 보스톤 삼원회사를 그만두고, 보스톤에서 김태술과 남경식물제조회사를 설립하였다. 1938년 3월 ‘고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 추도회’에 조전(弔電)을 보내 조문하였다.1942년 1월 자신의 집에서 임시회를 열고 일본을 폭격하는 미군 비행사를 격려하기 위해 격려금 75달러를 모금하였다. 이 돈을 바탕으로 고소암 등과 함께 100달러에 상당하는 국방공채를 매입한 후, 보스톤 시장 제임스 맥카디를 방문하여 기부하였다. 이에 보스톤 시장은 각 신문사의 신문기자와 사진기자를 불러 대서특필하게 하였다.1915년 4월 국민의무금 2달러 50센트를 후원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국민의무금 17회 132달러 50센트, 전시미주한인회 금력 찬조금 162달러, 독립의연금 15달러, 비행학생을 위한 의연금 1달러, 국민대표회 대표원 경비 의연금 1달러, 외무국 의연금 50센트, 보조금 2달러, 인구세 7회 8달러, 광복군 후원금 5달러, 독립금 2회 160달러, 국방공채 100달러, 21예금 2회 11달러 등, 합계 598달러를 독립운동자금으로 후원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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