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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미주 국민회에서 실시한 「재멕시코(在墨) 동포 인구등록(同胞人口登錄)」에는 원적이 황해 서흥군(瑞興郡) 경의선(京義線) 역전(驛前)으로 되어 있고, 나이는 47세로 되어 있으므로 1872년생으로 추정한다. 다만 1912년경 와하케냐지방회 설립 직후 보고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에는 본적이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일하방(日下坊) 달전리(達田里)로, 나이는 40세이다.
아내 구애경(具愛經)과 결혼하여 슬하에 1녀 4남을 낳았으나, 그중 아들 둘이 사망하여 1녀 2남만 생존하였다.
1905년 4월 1,033명의 한인들과 멕시코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멕시코 도착 후 유카탄(Yucatan)주 메리다(Merida) 지방의 에네켄농장에 배치되어 4년간 노예에 가까운 노동을 하였다. 1906년경 김제선·최춘택 등이 멕시코에서 금지된 기독교 비밀 전도 운동을 벌이자, 김윤원·이근영 등과 함께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 4년간의 노예계약 기간이 끝난 1909년 5월 9일 메리다 한인 305명과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를 창립하고 조병하와 함께 법무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7월 북미지방총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재정을 후원하고자 이근영 등 20명과 21달러 74센트(멕시코화폐 44페소)를 기부하였다. 1910년 5월 교회 집사로 활동하면서 스스로 번 돈으로 여비를 마련하여 농장을 순방하고 한인들을 인도하였다. 같은 달 메리다지방회에서 임시회를 열고 멕시코 한인사관학교인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위해 특별연조금을 모집하자, 김명순·이종오 등과 각기 1달러를 기부하였다. 그후 숭무학교에 입학하여 그해 9월 생도 33명 중 1인으로 을반(乙班)에 소속되어 공부하였다.
1910년 12월 메리다지방회의 신광희·김제선·정춘식 등 40여 명과 함께 멕시코 동남부 타바스코(Tabasco)주 프론테라(Frontera)로 이주하여 1911년 3월 신한동지방회(新韓洞地方會)를 설립하였다. 이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회장 신광희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1년 12월 신한동지방회 체임통상회에서 신광희와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홍수로 인한 각종 풍토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신한동지방회가 폐쇄되자, 베라크루스(Veracruz)주 와하케냐(Oxaqueño)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1912년 6월 와하케냐지방회(일명 五岳基那地方會)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회장 유진태의 대외 활동 시에는 회장 대리로 활동하였다. 그해 7월경 와하케냐지방회가 한인 2세들에게 한글과 역사 등을 가르치려고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자, 학교 찬성원이 되어 매달 50전씩 후원하였다. 1913년 5월 와하케냐지방회 회장 정춘식의 유고(有故)로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3년 와하케냐지방회 한인 청년의 지식 함양을 위해 토론회를 조직하였고, 조국 정신을 고취하고자 국어 야학을 설립하였으며, 체육을 위해 무예를 연습시키기도 하였다. 1914년 2월 와하케냐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이원석과 연설위원이 되어 강연하였다. 같은 해 4월경 와하케냐지방회가 회무 처리를 위해 평의원 7인을 선정하자, 고희민 등과 함께 선임되었다. 같은 해 7월경 대의원직을 사임하고 메리다로 다시 이주하였다. 1915년 5월 메리다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민회 창립기념식과 신민회(新民會) 사건으로 옥고를 겪다 출옥한 양기탁(梁起鐸)·임치정(林蚩正) 등 6명의 지사를 축하하는 예식에서 기도하였다. 같은 해 11월 1916년도 임원 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17년 1월 메리다지방회에서 한인 2세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해동학교(海東學校)를 설립하자, 간사로 임명되어 감독 방경일, 교장 김기창, 교사 이종오와 함께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中央總會) 총회장 안창호(安昌浩)를 멕시코로 초빙하려고 메리다지방회 회원들과 초청 여비·환영비·귀환 여비를 모집하자, 환영비 5달러, 회환 여비 15달러 등 20달러를 기부하였다. 1918년 메리다지방회 법무원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2월 메리다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기도를 하였으며, 이후 메리다지방회 주최로 열린 각종 행사에서도 도맡아 대표 기도를 하였다. 같은 해 4월 법무직을 사임하고, 8월 메리다 부근 레판(Lepan) 농장으로 이주하였다.
레판농장에서 한인 2세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반도학교를 설립하고, 교사가 되어 교장 이기선, 회계 김정식과 함께 역사·지리·산술·국어 등을 교육하였다. 1919년 1월 레판 경찰소(지방회보다 작은 단위의 조직) 서기 임병일이 사면하자 후임 서기로 선임되었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적십자회가 신한민보사에 적십자회 미주지부 설치와 함께 회원과 회비 모집을 요청하자, 유진태 등과 적십자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회비를 납부하였다. 1920년 메리다 지방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4월 15일 유카탄 거류 한인 190여 명과 함께 베라크루스 부근 산타페(Santa Fe)로 이주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 같은 해 5월 산타페 거주 한인 80여 명과 지방회를 조직하고 임시의장으로 북미지방총회에 지방회 인준을 요청하였다. 같은 해 6월 10일 지방총회로부터 산타페지방회가 정식 인가받자, 대의원으로 선임되어 회장 정덕천, 부회장 이명원, 총무 진광익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1년 가족과 함께 다시 멕시코 서해안 어촌인 코앗사코알코스(Coatza Coalcos, 일명 푸에르토 멕시코)로 이주하여 어업에 종사하였다. 1928년 2월 푸에르토지방회(일명 부엘도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도 대표 기도를 하였고, 같은 해 3월 3·1절 기념식에서 삼일기념금으로 멕시코 화폐로 10페소를 모금하는 한편, 서춘동·이근영·최인규와 함께 연설하였다. 1932년 7월경에는 멕시코 아구아 눌세오 석유광에서 최정식·공인덕·이근영 등과 노동하면서도 『신한민보』의 재정 후원을 위해 32페소를 모집하여 송금하였다.
1934년 이근영·김영복과 함께 다시 푸에르토지방회로 이주하였다. 1936년 3월 푸에르토지방회 주최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절차위원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한편, ‘독립운동 약사’를 강연하였다. 같은 해 8월 국어학교를 설립하고 주무교사가 되어 한인 2세들에게 국어 등을 교육하였다. 1937년 푸에르토지방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자, 2월 국민회 창립 기념식과 3월 3·1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취지 설명을 하였다. 같은 해 7월 푸에르토지방회에 국어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1주일에 5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수업하였다. 같은 해 12월 푸에르토지방회 지방대회에서 지방대표로 선임되었다. 1938년 2월과 3월 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민회 창립 기념식과 3·1절 기념식에서 연설하였다.
1938년 3월 30일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주최로 열린 도산 안창호 선생 추도회에서 기도와 함께 안창호의 약력에 대해 강연하였다. 1939년 지방회 서기 겸 지방대표가 되어 활동하면서 이후 2월 국민회 창립 기념식, 3월 3·1절 기념식, 5월 순국선현추도식, 8월 국치기념식 등에서 기도, 축사, 연설을 도맡아 하였다. 1940년 노동으로 생활하면서도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서기로 선임되었고, 5월 순국선현기념식에서 이근영과 함께 ‘순국선현 약사’에 대해 강연하였다. 같은 해 10월 동 지방회 주최로 열린 광복군 성립 축하식에 중국 국민당 당원을 초청하여 식을 거행하는 한편, 즉석에서 광복군 후원금을 모집하여 송금하였다. 1941년 무직(無職)으로 생활이 곤란한 중에도 2월 동 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민회 창립 기념식에서 ‘국민회 역사’를, 3월 3·1절 기념식에서는 ‘독립운동약사’를, 8월 국치기념식에서는 ‘국치의 유래’를, 11월 순국선열기념식에서 ‘선열들의 사적’에 대해 강연하였다. 또한 같은 해 8월 국치기념금 14페소 50전을 모아 송금하였고, 11월 지방회원들과 전체 결의로 노인 구제를 위해 수년간 적립한 200페소를 광복군 후원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1943년 국치기념식과 순국선열기념식에서 강연하였고, 12월 지방회 재정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3월 지방회 재정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7월 지방회 서기 정태순이 신병을 앓자, 대리 서기로 활동하였다. 1945년 3월 동 지방회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통일과 단합을 주제로 연설하였다. 이때 회원들과 군사운동금 350원을 모아 송금하였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의무금 11회 40원 50전, 국민부담금 3회 15원, 2·1기념금(국민회 창립 기념금) 50전, 3·1기념금 2회 2원, 독립의연금 10원, 광복군 후원금 10원, 인구세 9회 10원, 중국 항일 전쟁 동정금 1원 50전, 독립금 5원, 국치기념금 2회 1원 50전, 후원금 5회 4원 50전 등 100원 50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재정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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