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1879년 6월 9일 황해도 신계군(新溪郡) 고방면(古坊面) 와동(瓦洞)에서 아버지 김성유(金成裕)와 어머니 문씨(文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성진(韓聖眞)과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계철(溪喆)·계춘(溪春)·계선(溪善)과 딸 계신(溪新)·계순(溪順)을 낳았다. 아내 한성진은 문성선(文聖善)(일명 한성선)의 딸이자 한시대(韓始大)와 한영대(韓永大) 형제의 누이이다.1913년 8월 하와이 오아후(O’ahu)섬 와히아와(Wahiawa) 지방에 거주하던 중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지방총회 산하 와히아와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민의무금 5달러를 납부하였다. 1914년 1월 와히아와지방회의 체임통상회에서 임원을 개선할 때, 강순근과 함께 경찰로 선임되었다. 이후 미 본토로 이주하였다.1921년 1월 중부 캘리포니아주(中加州) 다뉴바(Dinuba) 지방에 거주하면서 다뉴바 한인들과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의 재정을 후원하였고, 1925년에는 딜라노(Delano) 인근 맥팔랜드(McFarland)에서 그 곳 거주 한인들과 한국의 기근구제금으로 16달러를 모아 송금하였다.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도 줄곧 딜라노에 거주하였다.1930년 3월 대한인국민회 딜라노지방회와 태프트(Taft)지방회가 합동으로 삼일절기념식을 거행하자 여기에 참석하였다. 같은 날 딜라노지방회가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공동회를 소집하자 공동회에 참석하여 딜라노 한인들과 모집한 후원금 172달러를 모아 중앙기관인 뉴욕(New York)으로 송금하였다. 그 해 7월 딜라노의 국어학교가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50달러를 후원하였다.1931년 3월 딜라노지방회 주최로 열린 삼일절 기념식에 참가하여 회원들과 함께 3·1기념금 44달러 30센트를 모금하여 국민회총회 적립부로 송금하였다. 그 해 9월 딜라노 국어학교인 태극학교 경비를 후원하기 위해 50달러를 기부하였고, 12월 25일에는 딜라노 한인들과 만주도포 구제금 51달러를 모아 송금하였다. 1934년 3월 딜라노지방회 주최로 열린 삼일절 기념식에서 본인과 아내, 장남 모두 3·1기념금을 기부하였다. 1935년 9월 당시 딜라노에서 수박농사로 생계를 꾸렸다. 이어 1936년 11월에는 본국의 수재(水災) 구제금을 기부하였다.1936년 12월 딜라노지방회에서 차기년도 임원을 선정하자, 실업부 위원으로 선임된 이래 1940년까지 4년 연속 실업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6년 12월 딜라노에 거주하는 김탁·한영숙(본명 (朴永淑))·김경자·김경산과 함께 흥사단(興士團)에 입단을 청원하여 1937년 1월 예비 단우가 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 후원금을 비롯하여 중국항일전쟁 동정금, 총회 경상비 특연금, 국민부담금, 건축의연금 등을 후원하였다.1938년 4월 딜라노에서 처남 한시대를 비롯하여 이진섭(李眞燮)·윤응호(尹應鎬)·김린수와 함께 생치농사를 지어 큰 이익을 얻었다. 그 해 11월 국민회 총회 총무 최진하(崔鎭河)가 원동특파원 경비를 모금하기 위해 딜라노를 방문하자, 한시대·김성권(金聲權) 등 17명과 함께 각기 12달러씩 쾌척할 것을 약조하였다. 12월 딜라노 거주 흥사단원인 윤진오(尹眞五)·안용범·이진섭과 함께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열린 흥사단 대회에 참석하였다. 1939년 12월 24일 흥사단 제26회 로스앤젤레스 지방 대회에 참석하여 기부금 10달러를 냈다.이어 1941년 10월, 딜라노 한인국어학교의 재정을 후원하기 위해 15달러를 기부하였다. 1943년 1월 딜라노지방회 구제위원으로 선임된 데 이어 1944년과 1945년에도 구제위원으로 선정되어 3년간 활동하였다. 1945년 2월 흥사단 딜라노지방 단우회에 참석하여 기부금 10달러를 납부하였다. 이때까지 딜라노에서 20에이커의 땅에서 생치농사를 지었다. 해방이 된 이후인 1946년에도 국민회 딜라노지방 구제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 4월 흥사단 단우로 활동하였다.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1913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의무금으로 20회 191달러, 특별외교비 의연금으로 20달러, 인구세로 16회 17달러, 광주학생운동 후원금으로 4달러, 3·1기념금으로 3회 3달러, 중국군인 위로금으로 3회 3달러, 보조금으로 3회 13달러, 임시정부 후원금으로 2회 10달러, 국민부담금으로 2회 24달러, 국민회 기본금으로 6회 30달러, 광복군 후원금으로 2회 35달러, 독립금으로 7회 80달러, 중경특파원 여비로 20달러, 군사운동금으로 25달러, 『신한민보』 대금으로 4회 20달러, 『신한민보』 식자기계 의연금으로 2회 15달러, 샌프란시스코회의 대표단 여비 10달러 등 총 566달러 이상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후원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1945년 보조금 20달러, 독립금 110달러 등을 기부하였다.자녀들은 미국에서 성장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미군에 입대하였다. 장남 계철은 1936년 1월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학(U. C. Berkeley)에 입학하여 1938년 5월 상과(商科)를 졸업하였다. 2남 계춘(영어명 존)은 1930년 딜라노 중학을 졸업하고, 주니어 칼리지를 졸업한 뒤 U. C. 버클리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였다. 1941년 US회사의 측량기수로 하와이로 건너가 근무하였다. 1942년 하와이에서 미국 공군에 입대하였고, 10월 채성희와 결혼하였다. 그 해 12월 아내를 하와이에 남겨두고 미 본토로 건너와 샌디애고(San Diego)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3년 11월 애리조나 항공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소위로 진급한 뒤 샌프란시스코로 전근하였다. 1944년 2월부터 전쟁에 투입되었으며, 이탈리아 전선으로 배치되어 수 차례 공중전에 참가하였다. 그 후 유고슬라비아 전선으로 이동 전투를 치르다 중상을 입고 이탈리아의 연합군 본부로 이송되어 연합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4월 14일 2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 해 6월 4일 로스앤젤레스한인교회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3남 계선(영어명 피터)은 1938년 6월 딜라노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1943년 4월 미 육군에 입대하여 미국 동부에 복무하였다. 1944년 5월에는 미주리주 크라우더 병영에서 상등병으로 근무하였다. 장녀 계신(영어명 헬렌)은 1933년 6월 딜라노에서 중학을 졸업하였으며, 1938년 8월 샌프란시스코 해군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김창수와 약혼하였다. 사위도 일제의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군에 입대하여 1945년 육군 소위로 복무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