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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12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다만, 자료에 따르면 1945년 2월 10일 55회 생일을 맞이한 것으로 보아 1889년 2월 10일생으로 추정된다. 1922년 2월 5일 차(車) 발가리다와 결혼하여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1905년 영국인 마이어스(John G. Myers)와 일본인 오바 간이치(大庭貫一)의 협잡과 사기에 속아 그해 4월 4일 어머니와 동행하여 1,033명의 한인들과 멕시코로 노예이민을 떠났다. 같은 해 5월 20일 멕시코 유카탄주(Yucatan) 메리다(Merina)에 도착한 뒤, 에네켄농장에 배치되어 4년간 노예와 다름없는 노동을 하였다. 계약기간이 끝나자, 1909년 5월 9일 메리다 한인 305명과 국민회(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산하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를 창립하고 창립회원이 되었다.
1910년 12월 멕시코혁명과 더불어 외국인 배척까지 겹치면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메리다지방회의 신광희(申光熙)·김성민(金聖民) 등 40여 명과 함께 멕시코 동남부 타바스코(Tabasco)주 프론테라(Frontera)로 이주하였다. 이주 후 프론테라 농장주와 계약을 체결하고 농토를 경작하기 시작하는 한편, 1911년 3월 신한동지방회(新韓洞地方會)를 설립하였다. 이때 김영화와 사찰(査察)로 선출되어 회장 신광희, 부회장 김성민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프론테라 지방에서 대홍수로 인한 각종 풍토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여 다시 메리다지방으로 돌아왔다.
1917년 4월 메리다지방회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中央總會) 회장 안창호(安昌浩)를 멕시코로 초빙하기 위해 회원들을 대상으로 초청 여비·환영비·귀환여비를 모집하자, 회환여비 15달러를 기부하였다. 이 무렵 1916년 11월 메리다지방회에서 설립한 진성학교(進成學校) 학생으로 재학하였다. 같은 해 8월 메리다지방회 산하에 비시야 지방경찰소(지방회 보다 작은 단위의 조직)를 새로 조직하고 법무원으로 선임되어 경찰 양재은, 서기 이돈의, 사찰 홍익심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8년 12월 1일 메리다지방회의 신구 임원 체임식에서 「우리 장래의 발전」이란 주제로 연설하였다.
그 후 멕시코혁명 등으로 메리다에서 생계를 유지하지 힘들게 되자, 1921년 3월 메리다 지방 한인 200여 명과 쿠바로 이주하여 마탄사스(Matanzas)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마탄사스 이주 후 아바나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한인들에게 일본 재외국민으로 등록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한인들과 함께 등록을 거부하고 한인대표기구를 조직하는 차원에서 1921년 6월 14일 마탄사스지방회를 설립하였다. 이때 구제원으로 선임되어 한인들의 생활 안정과 경조사 등을 살폈다. 같은 해 11월경 동(同) 지방회 차기년도 임원 선거에서 재무로 선출되자, 회장 차희관, 부회장 고창덕 등과 함께 1년간 활동하였다. 1924년 6월 마탄사스에서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를 상대로 임금인상 투쟁을 위해 동맹 파업을 전개하였고, 이어 김동근과 함께 노동회에 가입하였다. 이 일로 회사로부터 파면 당하자, 가족을 데리고 카르데나스로 이주하였다.
1924년 7월 카르데나스지방회 통상회에서 법무원 박상호가 사임하자, 후임 법무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29일 카르데나스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치기념식에서 「장래 독립」이란 주제로 장영기·강흥식과 나란히 연설하였다. 같은 해 11월 카르데나스지방회의 차기년도 임원 선거에서 서기와 학무로 선임되어, 회장 김세원, 부회장 박근배 등 신임 임원진과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5년 2월 겸직했던 서기직을 사임하였다. 같은 해 4월 동(同) 지방회 인구세 수봉위원(收捧委員)으로 선임되어 1년간 인구세를 수납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12월 동 지방회의 명년도 임원 선거에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지방회 회장 취임식에서 신임 부회장으로 「우리 국민회 태도 방침」이란 주제로 연설하였다. 1926년 2월 1일 동 지방회 주최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국민회 17년 역사」에 대해 강연하였고, 5월에 다시 동 지방회 인구세 수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 지방회 주최로 열린 국치기념식에서 기도와 함께 「우리의 장래」란 주제로 연설하였다.
1927년 10월경 카르데나스에 거주하던 박근배·김순원·장흥선·이성준·김봉희·고 김치일 가족과 함께 마탄사스로 다시 이주하여 평생을 살았다. 1928년 11월 마탄사스지방회의 1929년도 임원 선출시 구제원으로 선임되어, 회장 박창운, 부회장 서문경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9년 3월 노동관계로 잠시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어, 차희관이 후임 구제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곧 돌아와 같은 해 8월 지방회 구제원으로 다시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마탄사스한인교회에 목사 장영기가 부임하자, 방경일·차희관·고창덕·태덕일·이우식과 집사로 선정되어 줄곧 집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2월 국내의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마탄사스지방회에서 임시특별회를 열고 학생운동 후원금을 모집할 때, 회원들과 후원금을 기부하여 총 40달러를 국민회 총회에 송금하였다.
1932년 마탄사스지방회 학무로 활동하였고, 2월에 국민회 총회 공문에 의하여 연합회와 협동하여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임원을 선정하자, 재무로 선임되었다. 1933년 3월 마탄사스지방회 직속 국어교육기관인 민성국어학교가 재정 부족으로 한동안 운영이 중지되어, 이를 후원하기 위해 학부형회를 조직하고 서기 겸 재무로 선임되어 회장 서문경과 함께 봉사하였다. 같은 해 12월 동 지방회 임원 선거에서 차희관·고창덕·장영기·주한옥·백한성과 함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34년 2월 민성국어학교 교장과 간사가 되어 국어교육을 위해 힘썼다. 같은 해 11월 박두현과 함께 마탄사스지방회 연종대회(年終大會) 재정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5년 12월 민성국어학교 명년도 임원선거에서 서기 겸 재무로 선임되었다. 1936년 3월 3.1절 기념식에서 「금후 방침에 대하여」란 주제로 연설하였고, 12월 민성국어학교 임원 개선 시 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3월 동 지방회 주최 3.1절 기념식에서 서문경·차희관과 나란히 기념사를 하였다.
1940년 12월 마탄사스지방회의 차기년도 임원 선거에서 재무로 선임되어 신임 집행위원장 차희관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2년 2월 마탄사스지방회 경상비 부족 보충 특연금 수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18년부터 1945년까지 3.1기념금으로 3회 50전, 광복군 후원금 3회 2원 17전, 대일전선동맹 특연금 1원, 광주학생운동 후원금 1원, 독립금 8회 14원 47전, 국민의무금 8회 26원 50전, 국민부담금 8회 7원 83전, 인구세 9회 9원, 국민대표회 대표경비 1원 등 독립운동자금으로 114원 86전을 후원하였다. 이외에도 사회적 의연금으로 본국 수재 동정금, 카르데나스 한인 구제금, 특별구제금, 민성국어학교 후원금 등도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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