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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11월 26일 경기도 개성군(開城郡) 서부(西部) 용현(龍峴)에서 이익면(李翼勉)과 김씨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한민보』에 의하면 1928년 11월 23일 회갑을 맞았다. 원적은 경기 장단군(長湍郡) 송서면(松西面) 경릉리(景陵里) 대원동(大院洞)이다. 1881년 경기 풍덕군(豐德郡) 동면(東面) 청계(淸溪)로 이주하였으며, 1889년 원적지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다. 아내 고(高) 에리노는 1924년 9월 17일 사망하였고,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영국인 마이어스(John G. Myers)와 일본인 이민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大陸植民合資會社)의 사기극에 속아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한인들과 노예이민으로 멕시코로 건너왔다. 유카탄주(Yucatan)의 수도 메리다(Merina) 지방 에네켄 농장에 배치되어 4년간 혹독한 노예생활을 하였고, 1909년 5월 메리다 지방 한인 305명과 함께 미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를 설립하고 창립회원이 되었다.
1918년 초 ‘멕시코 흥사단(Young Korean Academy-Mexico Committee)’이 설립되자, 이종오·황보영주 등 16명과 특별단우가 되었다. 1918년 메리다지방회 산하 산나닷지방 경찰소(지방회 보다 작은 단위의 조직)의 경찰원으로 활동하다가 11월 사임하였다. 1920년 4월 15일 유카탄 거류 한인 190여 명과 베라크루스(Veracruz) 부근 산타페(Santa Fe)로 이주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 6월 10일 산타페지방회를 설립하고, 재무로 선임되었다.
1921년 4월 한인 200여 명과 쿠바 마나티 지방으로 이주하여, 5월 말경 마탄사스(Matanzas) 지방에 정착하여 평생을 살았다. 1923년 마탄사스지방회에서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하자, 찬성원이 되어 학교 운영을 지원하였다. 1925년 6월 마탄사스지방회관 수리비로 특연금을 기부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마탄사스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국민회 창립기념식, 삼일절 경축식, 국치기념식, 순국열사 추도회, 신구 임원교체식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하여 기도와 축사를 하였다. 1927년 11월 지방회 차기년도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11월에도 1930년도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서기로 선출된 아들과 지방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1930년 2월 1일 지방회 주최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한국 독립 축사’를 하였다. 2월 5일 국내의 광주학생운동 후원금을 모집하자, 후원금을 기부하여 모금액 40달러를 송금하였다. 그해 3월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국가와 사회에 충심」이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6월 1일에는 장인환(張仁煥) 의사 추도식에 참석하여 기부금을 의연하였다.
1931년 11월 1932년도 지방회 재무로 선임되었다. 1932년 10월 31일 이봉창 의사 추도회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하였다. 1933년 5월 1일 마탄사스지방회와 청년학원 합동으로 개최된 순국의사추도회에서 추도사를 하였다. 1937년 3월 쿠바정부가 구제를 목적으로 각지에 자선물품을 보내도록 명령하자, 지방회 회원들과 각 1달러씩 총 45달러를 모아 송금하였다. 1943년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마탄사스지방회 회원들과 10여년 동안 모은 독립금 300달러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1944년 11월 17일 순국선열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였다. 1945년 12월에는 이세창·서문경·고창덕 등 9인과 마탄사스지방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의무금 9회 38원 50전, 인구세 2회 2원, 3.1기념금 4회 55전, 국민부담금 7회 5원 80전, 광복군후원금 3회 2원 54전, 독립금 10회 12원 97전 등 총 62원 36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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