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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4044
성명
한자 金大善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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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4 훈격 건국포장
1909년 5월 멕시코 메리다 지방회 평의원, 1916년 12월 오학기나 지방회 부회장, 1925년 1월 부엘도 지방회 회장, 1927년 3월 묵경 지방회 구제원, 1928년 1월 학무, 동년 7월 실업부원, 1940년 4월 복설된 묵경 지방회의 집행위원장, 1942년 11월 의사부 위원에 선임되고, 1940년 12월 묵경 지방회 집행위원장 재직 시 광복군 후원금 모집을 주관해 임시정부를 지원했으며, 1918~1940년 독립운동자금을 수회 기부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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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2권(2016년 발간)

1909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메리다지방회, 오학기나지방회, 부엘도지방회, 멕시코시티지방회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09년 5월 9일 북미지방총회 산하에 메리다지방회가 창립되었고, 한인 3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때 김대선도 메리다지방회에 가입하여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1년 12월 오학기나지방회 회원, 1916년 12월 오학기나지방회 부회장, 1925년 1월 부엘도지방회, 1927년 2월 멕시코시티지방회 구제원, 1928년 1월 멕시코시티지방회 학무, 7월에는 실업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4월 복설(復設)된 멕시코시티지방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9월 광복군후원금 123원을 모금하여 대한인국민회 상무부로 보낸 뒤 임시정부로 송금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42년 11월에는 의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부터 1940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新韓民報(1909. 5. 26, 1917. 3. 8, 1918. 10. 24, 1919. 8. 7, 11. 15, 1920. 12. 2, 1925. 1. 22, 3. 19, 7. 9, 1926. 4. 29, 1927. 3. 31, 7. 18, 1928. 1. 19, 7. 19, 1931. 12. 3, 1932. 3. 3, 1939. 10. 19, 1940. 4. 18, 12. 5, 1942. 11. 26)
  • 1910년대 전후 공립협회ㆍ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김도훈, 국민대 박사학위논문, 2002)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대선 - 서울 -
본문
191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인구조사부에서 실시한 ‘재묵(在墨)동포인구등록’ 표에 의하면 1919년 당시 원적은 서울, 나이는 43세, 직업은 어업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1877년경 서울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4월 1,033명의 한인과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5월 멕시코 유카탄주Yucatān의 메리다Merida에 도착하였다. 메리다 도착 후 이민 한인들과 함께 25개 이상의 에네켄 농장으로 분산·배속되어 4년간 혹독한 노동을 하였다. 1909년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가 멕시코 한인의 해방을 위해 황사용(黃思溶)·방화중(邦化重)을 멕시코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유카탄 지역 한인들과 공동 결의를 통해 국민회 메리다지방회(일명 美利多地方會)를 설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계약 만료를 3일 앞둔 5월 9일 한인 305명과 함께 메리다지방회를 창립하고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11년 12월 유카탄 지역에 있던 한인 300여 명이 베라크루스Veracruz주 남쪽 와하케뇨Oaxaquenõ 지방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한인들은 이 지역을 ‘오학기나(五岳基那)’라고 불렀는데, 1911년 12월 메리다지방회 초대회장을 지낸 이근영을 비롯하여 신광희·최정식·유진태 등의 한인들과 함께 와하케뇨로 이주하여 미국인인 경영하는 제당공장에서 일하였다. 와하케뇨 한인들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지방회(五岳基那地方會)를 설립하여 활동하던 중, 1916년 12월 10일 오학기나지방회 체임통상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되어 회장 고희민과 함께 한인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17년 6월 와하케뇨 지방에 멕시코 혁명군 400명이 침입하여 정부군과 격전을 벌이자, 멕시코혁명을 피해 코앗사코알코스Coatza Coalcos(일명 Puerto Mexico, 당시 한인들은 멕시코 부엘도 또는 과살괄고 등으로 부름)로 이주하였다. 같은 해 10월 코앗사코알코스에 지방회보다 한 단계 낮은 조직인 경찰소를 설치하고 경찰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1월 동 경찰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그해 3·1절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1927년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광복이 될 때까지 거주하며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이인여·김상옥·황보영주 등과 함께 폐지되었던 멕시코시티지방회(일명 墨京地方會)를 부활시키고 구제원이 되었으며, 그해 3·1절 기념식에서 연설하였다. 1928년 1월 멕시코시티지방회 신임 임원 선출시 학무원으로 선출되어 회장 이명원을 보좌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전체 임원의 총사직으로 다시 임원을 개선할 때 실업부원이 되어 회장 이인여와 함께 한인 사회의 안정을 꾀하였다. 1929년 2월에는 오랫동안 병을 앓던 부인이 별세하였다. 1931년 7월 멕시코시티에 한인 2세 교육을 위한 국어학교 설립에 의연금을 후원하였다. 1940년 3·1절을 맞이하여 멕시코시티지방회를 복설(復設)하고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9월 중국에서 광복군(光復軍)이 창립되자, 11월경 광복군후원금 123원을 모금하여 대한인국민회 상무부로 보냈다. 이에 국민회는 이 후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1942년 11월 멕시코시티지방회 통상회에서 1943년도 의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18년 10월 국민의무금을 후원한 것을 비롯하여 1940년 12월까지 국민의무금 4회 8달러 50센트, 독립의연금 10달러, 인구세 5회 8달러, 혁명운동 준비를 위한 주례금 25센트, 각종 공금 10달러 등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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