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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8월 31일 경기도 개성군(開城郡) 영북면(嶺北面) 길수리(吉水里) 대천(大川)에서 아버지 김평렬(金坪烈)과 어머니 허씨(許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기연(金基秊)이며, 1887년부터 1893년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3년간 한반도 전역을 비롯하여 중국의 안둥현(安東縣)을 유람하였다. 1898년 개성으로 돌아와 ‘건재약국(乾材藥局)’ 등 상가를 운영하였다. 1905년 멕시코 유카탄Yucatán주 메리다Mérida 지방으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현지에서는 마누엘 킴Manuel Kim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09년 5월 9일 미주 샌프란시스코로부터 국민회(國民會)의 지원을 받아 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산하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가 설립되었고, 서기를 맡았다. 유카탄의 한인들은 1910년 10월 타바스코Tabasco 지방으로 이주하여, 신한동(新韓洞)이라 이름을 짓고 동장에 정춘식, 대표에 신광희, 서기에 김기창, 재무에 박국천이 맡았다.
1912년 1월에는 메리다지방회 회장과 재무 직책을 겸하였다가 같은 해 12월 이후부터는 서기·재무·구제원 등을 맡았다. 1912년부터 상가를 운영하다가 1915년 1월 멕시코통화 5,000원의 자본으로 한인 전용 여관과 식당을 겸한 잡화상점을 개업하여 멕시코 한인사회의 유지로 자리 잡으며 메리다지방회 회장에 임명되었다. 1916년에는 메리다지방회의 회장직을 내려놓고 실업부원을 맡았다. 1917년에는 신한민보사의 재묵 메리다 지사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메리다지방회에서의 직접적 활동과는 별개로, 1913년 11월, 1914년 1월, 1915년 7월에는 『신한민보』에 친일 행위에 대한 경계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을 고양하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1915년 6월에는 ‘지방회 창립기념가’를 소개하여 대한인국민회의 각 지방회에 알렸다.
또한 서당을 운영하던 경험을 살려 멕시코 한인사회의의 교육 분야에서도 활동하였다. 1915년 메리다지방회는 멕시코 정부에 청원하여 한인 자녀들을 위한 한인국어학교를 설립했고, 이때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17년 1월 8일 메리다지방회가 관할하는 해동학교(海東學校)가 설립되자 역시 교장의 직책을 맡아 학교 운영을 총괄하였다. 동시에 학교의 유지 동맹금을 내놓기도 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인국민회에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게 되었는데, 멕시코의 메리다지방회에서 독립의연 수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렇듯 멕시코 한인 동포의 복지 증진과 교육의 기회 제공에 힘쓰고, 독립운동 의식 고취와 애국금의 납부 등 독립운동에 매진한 결과 재미 한인사회는 그 존경과 감사의 의미로 ‘선생(先生)의 칭호’를 수여하였다.1918년 2월 멕시코 한인들은 국민회의 후신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총회의 영향력이 미주 본토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멕시코의 5개 지방이 연합하여 묵국연합지방회(墨國聯合地方會)를 설립할 것을 청원하였는데, 대표자 5명 중 유카타지방 대표로 선임되었다.
1918년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멕시코 순방을 계기로 그해 4월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1933년 흥사단 본부 제12반에 소속되어 반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미주한인학생선교회 멕시코 지방위원을 맡는 등 멕시코 한인사회의 교육 분야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7월 멕시코의 한인 여성들이 대한부인애국단을 조직하자 인도위원으로서 선임되었다. 딸 김마리아는 해당 단체에서 서기 및 재무를 맡았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임시정부 성립축하문(臨時政府) 成立祝賀文’과 ‘임시정부의 선언서(宣言書) 및 공약3장(公約三章)’에 ‘대한민족대표’로서 이름이 올라가기도 하였다. 동년 8월 이승만이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미주 한인사회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메리다지방회에서도 구미위원부의 공채표를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1920년 메리다지방회의 구역시찰원 등의 직책을 맡았고, 1921년 1월 임시정부에 멕시코의 불경기로 인해 명령대로 임시교민단(臨時僑民團)을 설립하기 어려움을 알리는 등 멕시코 한인사회의 실정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1922년 3월 구미위원부의 정한경(鄭翰景)에게 메리다의 재미 한인들이 ‘강냉이죽’으로 세끼조차 제대로 때우고 있는 형편을 알리며 애국금의 모집 등 멕시코 한인들의 경제적 협조가 불가능한 상태를 알리고, 구제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시찰원 등 메리다지방회의 간부로서 구미위원부 등 미주 본토 사회와의 소통, 한인사회로부터의 공채표 등 애국금의 모집, 멕시코 정부와 교섭, 한인 노동자 간 원활한 소통과 협력을 주도하였다.
1921년 3월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NewYork,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등을 순회한 뒤 미주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에 방문하여 멕시코, 특히 유카탄 지방의 열악한 실정을 보고하였다. 이후 새크라멘토Sacramento, 다뉴바Dinuba 지방을 순회하며 한인사회의 실정을 시찰한 뒤 멕시코로 돌아왔다.
1939년 메리다지방회의 서기를 맡았다. 1940년 6월 경영하던 사업 이전을 이유로 멕시코 메리다 지방에서 체투말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멕시코 재미 한인사회의 사업가로서 1923년 1월 안창호 등이 1912년 발기한 북미실업주식회사의 주주로서 투자하였다. 이후 1945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인국민회, 구미위원부를 비롯하여 멕시코 재미 한인사회에 꾸준히 의연금, 의무금, 애국금, 광복금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헌납하였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멕시코에 김기창·이종오, 쿠바에 임천택·박창운 등 제씨가 임시정부에 후원”하였다고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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