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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옥천면(沃川面) 문정리(門井里)에서 아버지 김유성(金有性)과 어머니 은진(恩津) 송씨(宋氏) 병현(秉賢)사이에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학립(學立), 호는 우고(友古)이며, 본명은 규성(奎成)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동지회(同志會),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등에서 활동하였다. 1903년 9월 충북 보은군(報恩郡) 속리면(俗離面) 평산(平山) 신씨(申氏) 석영(奭永)의 장녀 신수(申秀)와 혼례를 치렀으나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아내는 평생 시댁에서 홀로 지내다 남편이 미국에서 사망한 지 1년 뒤인 1947년 9월 12일 사망하였다.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형 규행(奎行)과 동생 규희(奎熙)와 함께 한문을 배웠다. 성장하여 서울로 올라와 양정의숙(養正義塾)과 관립 한성영어학교(漢城英語學校)(후에 한성외국어학교)를 다녔다고 하나 자료상 확인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한문과 영어에 능통하였다. 서울 유학 시절, 같은 고향 출신 김규흥(金奎興)과 그의 조카 김현구(金鉉九)를 만났다. 이때 김규흥은 중국 상하이(上海)에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찬동하여 김현구·홍승국(洪承國), 홍승국의 조카 송진헌(宋晋憲)과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1907년 미국에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조직했던 장경(張景, 일명 (張鴻法))이 그 해 9월 상하이로 건너와 12월 24일 대동보국회 상해연회(上海聯會)를 결성하자 유학생 5명과 함께 상해연회에 가입하는 한편, 상해회관 건립과 기관지 『대동공보(大同公報)』의 재정 후원을 위해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08년 3월 상해연회 구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4월 19일 대동보국회 상해연회에서 특별회를 개최하고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를 위해 의연금을 모집하자 장경을 비롯한 신규식(申圭植)의 조카 신형호(申衡浩) 등 대동보국회 회원들과 총 237원의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이 시기 장경 등과 결의형제(結義兄弟) 후 ‘홍(鴻)’자를 항렬자로 이름을 고쳐 김홍기로 개명하였다. 1908년 가을경 김현구·홍승국·송진헌이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나 김규흥이 설립하려던 무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하이에 남았다. 1908년 12월 30일 방학을 맞이하여 상하이에서 일시 귀국하였다.그 후 1909년 4월, 미국 뉴욕(New York)에 도착한 후 박용만(朴容萬)이 네브라스카(Nebraska)주 헤이스팅스(Hastings)에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에 입학한 김현구·홍승국이 1912~1913년경 여비를 보내자, 유럽을 거쳐 1913년 10월 29일 뉴욕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워싱턴이민국에서는 입국 비용 부족을 이유로 입국을 거절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인소년병학교 관계자들은 헤이스팅스대학 학장을 통해 전보를 보내는 한편, 뉴욕의 김헌식(金憲植)에게 편지를 보내 김헌식의 신원 보증으로 그 해 11월 13일 뉴욕에 상륙할 수 있었다. 뉴욕 상륙 후 곧 네브라스카주 오마하(Omaha)에 거주하면서 한인소년병학교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1914년 한인소년병학교가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재정상태가 열악해지자, 2월 2일 헤이스팅스에서 조진찬(曺振瓚)·신형호(申衡浩)·박처후(朴處厚)·홍승국 등 29명과 소년병학교 유지단을 조직하고 「소년병학교 유지단 취지서」와 「소년병학교 유지단 규칙」을 발표하면서 재정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해 4월 한인소년병학교에서 홍승국과 함께 국어·국문 교사로 선정되어 문법·작문·문학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이 헤이스팅스대학에 항의하는 바람에 소년병학교는 6년 만에 문을 닫았다. 한인소년병학교가 문을 닫은 후 1915년 1월 1일 소년병학교 후원자와 졸업생인 임동식·신형호·박처후·박장순·홍승국 등과 더불어 한인농업회사 취지서를 발표하고 콜로라도(Colorado)주에 회사를 설립하였다.1919년 3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특별의연금 5달러를 기부한 것을 비롯하여 1918년 11월부터 1919년 12월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독립운동 후원을 위해 대표의연·독립의연·21례금·애국금·공채표 등 11달러를 의연(義捐)하였다. 1919년 7월 1일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 「지혜+피+돈=성공」이라는 글을 실어 독립운동을 후원할 것을 호소하였고, 같은 달 26일에도 「우리나라 이름」이란 글을 실어 ‘고려’를 국명(國名)으로 부를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 11월 러시아에서 한인교육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우스리스크(雙城)의 서오성(徐五星, 일명 애당)과 서신으로 독립운동 정보를 교환하였다.1920년 오마하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위스콘신(Wisconsin)주 애플톤(Appleton)에 있는 로렌스대학(Lawranse Collage)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이즈음 워싱턴(Washington)에 머물던 이승만(李承晩)이 박상하(朴相夏)에게 외교와 선전에 전력하기 위해 영어와 영문에 필요한 인재로 정태원(鄭台源)·이춘호(李春湖)와 함께 와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 해 9월 시카고Chicago에서 대한인유학생회 시카고지회가 설립되자, 서기로 선임되어 회장 정태은, 회계 현성렴과 함께 활동하였다.1921년 7월 21일 『신한민보』에 「이주연의 행동에 대한 성토」란 글을 통해 일본영사관을 드나들며 자신에게 접근하여 한국유학생들의 정보를 탐문해 줄 것을 요청한 이주연의 친일 행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1922년 3월 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주최로 열린 삼일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같은 달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가 재정이 곤궁하다는 소식을 듣자, 시카고 지방위원 정태은·이태영과 함께 특별의연금 279달러 75전을 모아 워싱턴의 구미위원부로 송금하였다. 그 해 7월 『개벽』 제25호에 「남선(南鮮) 농주(農主)에게 경고하노라」는 글을 실어 지주들의 의식 변화를 촉구하였다.1923년 6월 시카고대학에서 개최된 제1회 대한인유학생회에서 참가하여 대회 국문 서기로 선임되어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한편, 유학생회 산하에 설치된 4개 분과위원회 중 재정위원회 위원이자 사교위원회 회장으로도 선임되었다. 그 해 8월 시카고에서 정태은(鄭太殷)·조종진(趙鍾震)·황휴(黃烋) 등과 중국 식료품과 조미료 등을 제조·판매하는 동양식물회사(東洋食物會社, Oriental Food Company)를 설립하였다. 이때 회계를 맡았고 매니저는 정태은이었다. 자본금 1만 5천 달러로 시작한 이 회사는 1927년 11월 일리노이(Illinois)주로부터 인허(認許)를 얻어 주식회사가 되면서 그 후 15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1928년 2월 뉴욕에서 김경(金慶)·김도연(金度演)·허정(許政)·윤치영(尹致暎)·방화중(邦化重)·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삼일신보(三一申報)』 발기인으로 창간 취지서를 발표하고, 3월 『삼일신보』를 창간하였다. 그 해 9월 시카고에 동지회(同志會) 지회를 설립하고 임원을 선출하자, 김경·정태은·김원용(金元容)·오한수·임효원과 이사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10월 시카고 한인들과 본국의 수재(水災) 소식을 듣고 구제금 219달러 50센트를 모집하여 동아일보사로 송금하였다.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같은 달 29일 강영소(姜永韶) 등 17명과 시카고 대한인공동회 발기인이 되어 「대한인 동포에게 고하노라」를 공포하고 공동회 소집을 의결하였다. 그리하여 2월 3일 시카고한인교회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하여 시카고 대한인공동회를 창립하였고 참석 한인들과 215달러를 기부하였다. 그 해 7월 『태평양잡지』에 「만주 소식에 대하여」라는 글을 싣고 만주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일본영사관측과 충돌한 것에 대해 해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1931년 1월 시카고학생회 주최로 영신회가 개최되자, 정한경(鄭翰景)·강영문(姜英文)과 나란히 소감을 발표하였다. 그 해 3월 동지회 시카고지회 주최로 하와이 시국에 대한 대강연회에 참석하여 하와이 분란의 원인에 대해 이승만을 옹호하였다. 또 그 해 9월 동지회 시카고지회 임원 선정시 남정헌·양일태·장인명(張仁明)·장기영 등과 이사원으로 선출되었다. 1933년 1월 시카고학생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해 10월에는 동지회 시카고지회 회장으로 제네바(Geneva)로부터 돌아온 이승만 환영과 강연회를 주최하였다. 1934년 3월 시카고 동지회 주최로 삼일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개회와 함께 기념 취지를 설명하였다.1936년 6월 시카고의 각 한인 단체들이 연합회를 결성하자,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주최로 열린 재미한인 합동축하회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그 해 8월 29일에는 시카고 한인단체가 합동으로 국치기념식을 개최하자, 기념식에서 망국의 원인과 함께 대동단결을 강조하였다.1938년 3월 국민회 시카고지방회에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추도식을 거행하자, 동지회 회원 김경·정태은 등과 참석하여 추도사를 하였다. 1939년 6월 동지회 시카고지회 임원 선임시 통신원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2월 본국에 한재(旱災)가 극심하다는 소식이 시카고에 전해지자, 시카고 한인들과 22달러 50센트를 모집하여 송금하였고, 그 해 12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립 소식을 듣고는 시카고 한인들과 광복군 후원금 33달러를 모아 전달하였다.1941년 3월 1일에는 시카고 지역 국민회와 동지회가 합동으로 중화회관(中華會館)에서 삼일절 경축식을 거행하였다. 중국인 300여 명도 참석한 이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또한 중국총영사 대리와 중국구국회 주석, 그리고 중회회관 주석도 연이어 연설하며 한인의 독립운동과 중한(中韓) 합작을 선전하였다. 이날 경축식은 시카고 중국신문인 『삼민신보』에 대대적으로 실렸다. 그 해 4월에는 동지회의 외교비 수봉위원(收捧委員)이 되었다. 이어 12월에는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일전쟁이 일어나자, 시카고 한인들과 모임을 갖고 전시 미국 국방 후원과 한인의 자위책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 결과 시카고 모든 단체가 연합하여 시카고지방연합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임원을 선정할 때, 서기 겸 재무로 선임되었다.1942년 3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대표자, 한미협회(韓美協會), 그리고 국내외 한인 대표자들이 모이자, 이 모임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미국 국회를 비롯한 중국·영국·소련 등 각국 정부에도 요구하는 전보를 발송하자는 결의문을 작성하기로 의결하였다. 그 해 6월 동지회 시카고지회 주최로 동지회 북미지방대표회가 개최되자, 시카고지회 서기로 회장 김종림(金鍾林)과 함께 참석하여 임시정부와 주미외교위원부 후원을 비롯하여 이승만에게 충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편, “한길수(韓吉洙) 또는 어떠한 그의 측근과도 타협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그 해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 대표 한길수에게 항의 서신을 받았다. 그 해 9월 17일 한국광복군 성립 제2주년 기념식이 시카고지방연합회 주최로 열리자, 기념식에 참석하여 「광복군 약사」를 설명하였다.1944년 6월 이승만이 주미외교부 개조 문제를 계기로 자신의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자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일명 한국외교위원부) 협찬회(協贊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협찬회는 산하 5개 분과 위원부를 설치하였는데, 내무위원부에 위원으로 선정되어 부장 황창하, 서기 황사용, 위원 나재원(羅在援)·장인명(張仁明)·조대흥·한영교·정기원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1937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회에 납부한 독립금 6회 160달러, 신문대금 10달러, 동지회에 납부한 연례금 4회 13달러, 담보금 10달러, 독립금 4회 40달러 등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재정 후원하였다. 특히 시카고 동지회에는 1945년 독립금 534달러를 후원하기도 하였다.광복 이후에도 동지회 시카고지회 서기로 활동하는 한편, 1945년 9월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의 촉탁으로 각지를 순행하였다. 같은 달 15일 동지회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총회관에 모임을 갖고 시국을 협의하는 한편, 9월 16일에는 동지회 남가주(南加州, 남부 캘리포니아주) 지방 특별회를 개최하고 동지들과 회견하였다.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동지회에 정부후원금 50달러, 독립금 40달러, 특연금 15달러를 후원하였다. 1946년 1월 동지회 시카고지회 연례회에서 임원을 선거할 때, 2년 연속 서기로 연임되었다. 이때 동지회는 워싱턴 주재 주미외교위원부를 계속 후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1월 28일 피를 토하며 병세가 위중하자 일리노이주의 성 누가병원(St. LUKES Hospita)l 입원하여 수혈을 받았다. 그 해 4월 수술을 받았으나, 1946년 5월 30일 오전 시카고 쿡 카운티병원(Cook Cuonty Hospital)에서 사망하였다. 6월 1일 동지회 주최로 추도식 거행하고 장례를 치른 뒤 시카고의 마운티 호프 공동묘지(Mt. Hope Cemetery)에 안장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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