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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에 따르면 1900년생으로 4월 19일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출신지는 알 수 없다. 1922년 7월 31일 현동완·심원남·박경희와 함께 차이나(China)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 현동완과 함께 시카고를 향해 출발하였다. 1923년 9월경 이승만(李承晩)은 뉴욕의 김영섭(金永燮)을 뉴욕한인교회 목사로 추천함과 동시에 워싱턴에 있는 동지회 간부 남궁염(南宮炎)을 뉴욕에 파견하여 1922년 1월 뉴욕에서 조직한 대광단(大光團)을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뉴욕지부로 개편하였다. 이때 뉴욕지부 회계로 선임되어 회장 남궁염, 서기 안택주(安宅柱)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8년 2월에는 뉴욕에서 김경(金慶)·김도연(金度演)·허정(許政)·오천석(吳天錫)·윤치영(尹致暎)·방화중(邦化重)·장덕수(張德秀)·남궁염(南宮炎) 등과 함께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 취지서를 발표하고 발기인이 되었다. 『삼일신보』는 3월 창간되었으나, 1930년 6월 폐간되었다.
1930년 1월 뉴욕의 한인단체들이 제1차 공동회를 개최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대책강구회를 조직하기로 의결한 뒤 ‘뉴욕동포 내지(內地) 학생운동 대책강구회’를 결성하고 임원을 선정하였다. 이때 의연금을 모집하자 2달러를 기부하였다. 1931년 6월 북미한인학생총회 동부연회가 뉴욕한인교회에서 개최되자 동 대회에 참석하는 한편, 학생총회를 위해 기부금을 제공하였다.
1936년 1월 뉴욕한인교회 주최로 열린 정기총회에서 안정수(安定洙)·이진일(李震日)·함용준·김세선·조홍식과 함께 한인교회 이사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3월에는 뉴욕의 국민회(國民會)·흥사단(興士團)·학생회·교민단·동지회 등이 공동회를 구성하고 삼일절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기념식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자, 동지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1938년 3월 대한인동지회 뉴욕지부 총회에서 임원 선정 시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해 6월에는 뉴욕동지회의 후원으로 동지회보를 다시 발간하는데 힘썼다.
1941년 1월 대한인동지회 뉴욕지부 임원 개선시 집행위원 7인 중 1인으로 선임되어 회장 남궁염, 총무 이진일 등과 함께 동지회 사무를 집행하였다. 11월에는 동지회 뉴욕지부 정기 통상회에서 신임 임원을 개선하자, 함용준·정윤수와 함께 이사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2월 하순 워싱턴 라파예트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가 개최되자, 로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에 있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대표, 한미협회 대표, 그리고 한국·중국·러시아 한인 대표들과 함께 참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을 동의하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해 6월 시카고에서 북미지방 동지대표회가 개최되자, 뉴욕 대표로 참석하여 조직 명칭을 북미동지회 총지부로 개칭하였고, 임원 선정시 회계로 선임되어 총지부장으로 남궁염, 서기 김세선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4년 6월 이승만이 주미외교부 개조문제를 계기로 자신의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자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일명 한국외교위원부) 협찬회(協贊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협찬회는 산하 5개 분과 위원부를 설치하였는데, 이중 김세선·유일한·남궁염·신상근 등과 경제분과위원부에 배속되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된 이후에도 동지회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해 12월 동지회 뉴욕지방회의 차기년도 임원 선거에서 회장에 당선되었다. 1946년 1월에는 동지회 북미총회 제5차 연례 대표회에 참가하여 양로원 부채 청장금 뉴욕지방 수합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독립금 75달러를 후원하였다. 이외에도 1941년 동지회 담보금 2달러, 1944년 동지회 북미총회 재정보단에 10달러, 1946년 6월 『북미시보(北美時報)』 대금 5달러, 『북미시보』 식자기 특연금 50달러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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