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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1672
성명
한자 李惠鍊
이명 安惠連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08 훈격 애족장
도산 안창호의 부인으로 1909년부터 지속적으로 의연금·국민의무금·특별의연 등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으며 1919년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된 부인친애회에 참여하였고 1919년 8월 다뉴바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에 부인친애회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의 위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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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이혜련은 평남 강서군에서 서당 훈장인 이석관(李錫觀)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서울의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그후 1902년 9월 3일 만 18세 때 서울 제중원에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鎬)와 결혼하였다. 결혼 직후 이혜련은 안창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남편 안창호를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하여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지도하는 한편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안창호는 1909년 2월 미본토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를 합동하여 국민회를 창설하여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만들었다.

이시기 이혜련은 남편 도산 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일제에 강점된 이후에도 안창호는 미국과 중국·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아내인 이혜련은 도산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를 지원하기 지속적으로 의연금, 국민의무금, 특별의연금 등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도산은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3·1운동의 발발 소식에 접한 미주지역 한인들은 미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미국민과 미국정부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미주지역의 부인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는데, 하와이에서는 1919년 4월 1일 대한부인구제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으며 미본토에서도 여성들의 단체가 새롭게 결성되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이혜련은 부인친애회를 조직하여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하였다. 당시 부인친애회에서는 한 주일에 2일(화, 금요일)은 고기없는[meatless] 날, 한 주일에 하루(수요일)는 간장없는[kanchangless] 날로 정하여 3·1운동으로 인해 고국에서 고통받는 동포들과 함께 하고자 하였다.

한편, 북미주 지역의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와 다뉴바의 신한부인회는 1919년 5월 18일 북미 지역 부인회를 통합하기 위한 통고문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8월 2일 각지의 부인 대표자들이 다뉴바에 모여 발기대회를 열고 합동을 결의하였다. 이때 참석한 부인회는 다뉴바의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의 한국부인회, 윌로우스의 지방부인회 등으로 대표들이 참석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을 결성하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 부인친애회 대표로는 이혜련을 비롯하여 임메불·박순애·김혜원 등이 참석하였다. 이와 같이 북미주의 4개 지방 부인단체들이 국민회 중앙총회에 청원하여 1919년 8월 5일 정식으로 대한여자애국단이 결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을 중심으로 국민의무금, 21례, 국민회보조금, 특별의연 등의 모금을 주도하였고, 미국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 지부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2년 중국 상해에서 윤봉길의 투탄의거 직후 남편 안창호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같은 불행에도 불구하고 이혜련은 1933년 5월 9일 대한여자애국단 총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할 때 더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 옥중에 있던 안창호는 부인 이혜련에게 편지로나마 위안과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1937년 3월 대한인국민회가 로스앤젤레스에 총회관을 건립하면서 이혜련을 중심으로 한 여자애국단에서도 재정적으로 협조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원의 일원으로 중일전쟁 재난민과 부상병들을 돕기 위하여 약품과 붕대를 모집하였다. 그럴 즈음 일제는 안창호를 또 다시 체포하여 서대문형무소로 이송시켰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38년 3월 10일 불행히도 순국(殉國)하고 말았다. 이처럼 남편인 도산이 순국하였음에도 이혜련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여자애국단을 통한 항일전에 참여하였다. 여자애국단에서는 중국 난민구제를 위해 구제금으로 78달러를 거두어 송미령(宋美齡)에게 보냈으며, 또 송미령의 요청으로 1939년 12월 76달러를 송금하였다.

도산 안창호와 이혜련 사이에는 장남 필립, 차남 필선, 삼남 필영, 장녀 수산, 차녀 수라를 두었다. 이들 자녀들도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이후 항일전에 당당히 참여하였다. 이혜련의 자녀들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국방에 협조하기 위해 장남 안필립과 안필선은 민병대에 입대하였다.

조국이 독립된 이후인 1946년 1월 6일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신년도 대한여자애국단 총회가 개최되어 이혜련이 총단장으로 선출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고국과 동포들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다가 86세 생일인 1969년 4월 21일 영면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신한민보(1909. 6. 30, 1918. 8. 15, 1919. 2. 13·4. 22·5. 24·7. 1·10. 18·11. 18, 1920. 3. 16, 1924. 2. 14·9. 11)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8집, 738~739, 739~741면
  • 도산의 아내 이혜련 여사(기러기, 1969.5)
  • 미주 한인여성단체의 광복운동 지원 연구(박용옥, 1994) 280~283, 295면
  • 공립신보(1909. 1. 6)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혜련 안혜련, 헬렌 안(Helen Ahn), 이혜련(李慧鍊) 평남 강서(江西) -
본문
1884년 4월 21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보림면(普林面) 화학리(和鶴里)에서 서당 훈장인 이석관(李錫觀)의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성(安城)이다. 이명은 안혜련, 헬렌 안(Helen Ahn), 이혜련(李慧鍊)이다.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고모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부지런하고 우직하면서 친화력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1897년 안창호의 누이인 안신호와 서울의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 전신)에 입학하였다. 1902년 9월 3일 밀러 목사의 주례로 제중원에서 안창호와 혼인식을 치루고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드류(A. Damer Drew, 유대모) 박사의 집에 집사로 취업하였다. 1903년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해 북미에서 첫 한인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중국인 예배당을 빌린 예배에 참석한 여성은 그와 장경의 부인뿐이었다. 도산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주선소를 운영하는 동안, 리버사이드로 이주해 한인노동자들과 파차파 캠프(Pachappa Camp)를 세우고 한인공동체를 일구었다.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가 결성되기 일주일 전인 3월 29일 맏아들 필립을 낳았다. 1907년 1월 초순 리버사이드에서 결성된 대한신민회의 전권위원으로 임명된 안창호가 한국으로 떠날 때 “당신은 애국자요 영걸의 인물로서 국가에 속한 사람이니,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대로 마음 놓고 활동하시오”라고 격려했다. 국내에서 신민회를 결성하고 시베리아와 북만주 일대 한인사회를 돌아보고 1911년 9월 안창호가 미국으로 돌아왔고, 1912년 7월 5일 둘째 아들 필선이 태어났다. 미국병원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백인가정의 빨래를 해 주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1913년 5월 13일 흥사단이 조직되자 가입하였고 흥사단소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흥사단의 공무와 가족생활이 한 공간에서 이루어져, 단원들 뒷바라지가 일상이었다.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으레 흥사단소를 찾았으며 중요한 한인행사의 모임이 흥사단소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한인 커뮤니티의 센터 역할을 하였다. 일요일이면 예배를 마친 이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왔기에, 접대를 위해 백인가정에서 청소·세탁·바느질·요리 등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하였다. 3·1운동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LA 대한부인친애회 소속으로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하였다. 1919년 8월 5일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이 출범했고, LA 대한부인친애회가 대한여자애국단으로 통합된 후에는 LA지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원들은 매월 애국금으로 3달러를 기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내놓았다. 그리고 ‘안혜련’ 혹은 ‘안부인 혜련’의 이름으로 국민의무금, 21예납금(二十一例納金), 국민회 보조금, 특별의연금 등에 의연하였고, 미국 적십자사 LA지부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25년 3월 26일 차경신이 혼인할 때 신부를 데리고 입장하는 등 재미한인여성들의 대모 노릇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의 집안일을 해주며, 맏아들 필립과 함께 과일가게에서 일하였으며 딸 수산과 수라는 방과 후와 주말이면 집안일을 도왔다. 1927년 막내 필영이 태어난 후에는 온가족이 절약생활을 하며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날 안창호가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녀는 막내 필영을 데리고 한국으로 와서 안창호의 옥바라지를 위해 1936년 8월 3일 산 페드로항을 출발하는 프레지던트 쿨리지호에 승선할 배표를 구입하기도 했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귀국을 단념함으로써 남편과의 재회가 무산되었다. 1937년 8월 27일 흥사단본부에서 열린 대한여자애국단 특별집회에서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선출되었고, 중일전쟁 재난민과 부상병들을 돕기 위해 약품과 붕대 등을 모집하였으며, 중국 재난민 구제통을 만들어 한인 상점에 배치하고 거스름돈을 모아 구제 활동에 나섰다. 1938년 3월 10일 도산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그녀는 미국 국방자위군에 참가하여, 적십자사와 각 병원 복무, 야간순행 경찰대 보좌, 육해군 국방공작에 복무, 전시공채 판매 등을 장려하는 한편, 태평양군도와 원동전선에서 특무공작에 참여할 의용대 모집에 협조하는 등 미국정부의 전쟁 수행을 도왔다. 1948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정부의 전쟁 지원을 위해 27만 달러를 모금하였다. 1944년 5월 7일 대한여자애국단에서 마련한 회갑축하연에서(원래 회갑일은 4월 18일로, 이날은 가족 모임이었다). 그녀는 “우리의 마음은 각각 다르고 생각은 저마다 같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고자 하는 원대한 목적과 일은 같다”고 말하였다. 1946년 1월 6일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열린 신년도 첫 총회임원회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총단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노동정지를 당해 생활난이 심해 구제를 요청해 온 쿠바 거주 동포들을 위한 구제금 모금을 통해 121달러를 지원했다. 장녀 안수산을 결혼시킨 후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직을 물러났다. 한국전쟁 중 3년 동안 한국구제회(Korea Relief Society)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온종일 고국으로 보내는 옷가지·약품·담요 등을 포장하는 일을 감당하였다. 196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3·1절 기념식 때 남편 안창호에게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대신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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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산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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