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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383
성명
한자 文讓穆
이명 文良穆, 文聖烈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4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894년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실패하고 1903년 하와이로 망명하였다가 1906년 미국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도항하여 1907. 3월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회장등으로 활동하면서 1909. 1월 경까지 대동공보사(大同公報社)의 사장,『대동공보(大同公報)』의 주필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08년에는 일본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스티븐의 발언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이승만 저술의『국민개병설』과『군인수지(軍人須知)』를 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1909년경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에 ‘소년병학교’를 개설하자 학생들을 권유하여 입교시켰으며 1911년에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총회장(總會長), 1912년에는『신한민보(新韓民報)』주필로 활동하였고 1917, 18년까지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회원(會員)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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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충남 서산(瑞山, 현 태안) 사람이다.

일찍이 동학에 몸을 담고 있던 중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적극 참여하여 반봉건·반침략을 목적으로 혁명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3년 경기도 인천(仁川)에서 서당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일제의 한국침탈이 노골화되어 가자,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1905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 모집에 응모하여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1907년 3월 장 경(張景)·백일규(白一圭)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결성하고 1907년 10월 중앙회장에 선임됨과 동시에 동회 기관지인 대동공보사(大同公報社) 사장 겸 발행인을 겸직하면서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켰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과 글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자, 대동보국회에서는 미주 한인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합동으로 공동회(共同會)를 개최하여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때 4인의 총대(總代)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그는 스티븐스를 방문하여 그의 발언을 정정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그를 구타하고 돌아와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이튿날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양 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판사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면서 공판과정을 '독립재판(獨立裁判)'으로 규정하는 등 재판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구미 각국에 널리 인식시켰다. 1908년 7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박용만(朴容萬)이 한인군사학교(韓人軍事學校)의 설립과 재미한인단체의 통합 논의를 목적으로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1909년경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자 학생들을 권유·입교시키는 등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무장투쟁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91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동신서관(大同新書館)이란 출판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2월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정신(獨立精神)』을 출판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기울인 그는 동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흡수 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의 총무로 당선되었고, 이듬해인 1911년 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항하기 위해 군인양성운동(軍人養成運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독립군 기지 개척과 해외 한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지방총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1년 4월에는 박용만이 저술한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을 출판하였고, 1912년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선임되자 그해 6월에 박용만의 『군인수지(軍人須知)』를 발간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민족의식 선도에 앞장을 섰다. 그 후 계속 대한인국민회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40년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47면
  • 대한계년사(국사편찬위원회) 하권 303∼305면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129·263·26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122·12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7권 195·19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55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1집 430면
  • 태평양주보(1941. 4. 19, 4. 26, 5. 3)
  • 국민회 의무금 지출(1917. 2. 15, 5. 24, 1918. 9. 12)
  • 신한민보(1941. 1. 9, 1. 16)
  • 한국민족운동사연구(1989) 제4집 공립협회의 민족운동연구(김도훈)
  • 박영석 교수 화갑논총(1992) 구한말 미주의 대동보국회에 관한 일고찰(최기영)
  • 박영석 교수 화갑논총(1992) 재미삼일운동총사령관 백일규의 투쟁일생(방선주)
  • 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 86·8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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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문양목 자 : 승렬(承烈), 이명 : 문양목(文良穆), 문성렬(文聖烈) 충남 서산(瑞山) 장인환·전명운의거
본문
1869년 6월 7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남면(南面) 몽산리(夢山里, 현 태안군 남면 몽산리)에서 아버지 문상도(文常道)와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 安氏)의 2남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남평문씨족보』에는 출생일이 12월 23일로 기재되어 있다.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승렬(承烈)이며, 충선공 문익점(文益漸)의 18세손이다. 한자가 다른 문양목(文)良(穆)과 문성렬(文聖烈)이라는 이명이 있다. 김해 김씨 김제연(金濟連)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필원을 낳았다.한학에 출중하여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1894년 9월 말 동학농민군의 대오를 편성할 때 남평 문씨 일가와 함께 참여하였다. 11월 이후 일본군의 공격으로 서산지역 동학농민군이 패퇴할 때 체포되었으나 관군에 가담했던 서당 친구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부인 김해 김씨는 농민전쟁의 와중에 사망하였다.1903년 인천으로 피신하여 서당교사로 있다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모집 광고를 보고 하와이 이민을 결심하였다. 떠나기 전 종형 문우목(文禹穆)에게 딸 필원을 맡겼다. 1905년 1월 캅틱(Coptic)호 편으로 출발, 2월 2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사탕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샌프란시스코에서 동학 접주 출신인 백일규(白一圭)를 비롯해 장경(張景)·방사겸(方四兼) 등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 출신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1907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교육회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개편하는 데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대동보국회 제2대 중앙총회장에 선임되어 기관지 『대동공보』의 사장을 겸하였다. 스톡턴(Stockton)·프레즈노(Fresno)·칼린·덴버·솔트레이크시티 등지에 대동보국회 지방회를 확장하였고, 『대동공보』를 통해 국권회복 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항일운동단체로 키웠다.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친일 인사 스티븐스(D.W. Stevens)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일제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망언을 하자, 3월 22일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共立協會)의 공동회에서 이학현과 대동보국회 측 대책위원에 선임되었다. 공립협회 대표는 정재관(鄭在寬)과 최유섭(崔有涉)이었다. 그 날 오후 대표 4인은 스티븐스가 투숙하고 있는 페어몬트 호텔로 찾아가 관련 발언의 정정과 해명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가 이를 거절하자 격분하여 그를 구타하고 돌아왔다.3월 23일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의 제2차 공동회에서 공립협회 최유섭·김명일·정재관·이일, 대동보국회 문양목·백일규·이용하로 구성된 7인 재판정권위원에 선출되었다. 아울러 김명일과 함께 의연금 모금 등 재무 책임을 맡아 3월부터 9월까지 북미 대륙은 물론 하와이 한인사회와 국내에서 6,065달러를 모금하여 변호사 비용을 포함한 재판후원 활동에 충당하였다. 1908년 이후 정간된 『대동공보』의 인쇄 시설로 대동신서관(大同新書館)을 설립하여 1910년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간행한 바 있다.1910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와 국민회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무가 되어 총회장 황사용(黃思溶)과 함께 이끌었다. 1911년에는 북미지방총회장에 선임되어 시베리아와 만주지역 지방총회 설립에 진력하였다. 그 해 6월 국민의무금 제도를 신설하고, 『신한민보』에 납부를 역설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또 박용만(朴容萬)이 네브라스카의 커니(Kearney)에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자,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였다. 아울러 독립군 양성을 통한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을 주창하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1911년 1월에는 네브래스카 헤이스팅스(Hastings)를 방문해 박용만과 백일규 등 한인소년병학교 관계자들을 만났고, 박용만을 신한민보 주필로 초빙하였다.1911년 7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게 되면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사직하였다. 1913년 8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주하였고, 정찬성과 결혼하였다. 1914년 6월 샌프란시스코로 귀환해 그 해 7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장에 선임되었다. 7월 25일 백일규와 샌쿠엔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장인환을 면회하고 격려하였다. 이후 장인환 가출옥 청원운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7월 14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본격적으로 가출옥 청원운동에 나선 결과, 1919년 1월 10일 장인환이 석방되었다.그 사이 1914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 행사를 거행하였고, 9월 중앙총회 원동위원 박공륙(朴公六)의 보증을 받아 정재면(鄭載冕)을 비롯한 북간도 거주 동포 22인을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 입회시켰다. 1914년 말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장을 사임한 후 1917년 6월 맨티카(Menteca) 지방회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맨티카에서 무 농사를 경영하였고, 스톡턴에 여관을 구입하여 한인들에게 노동을 주선하고 숙소를 제공하였다.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인 1918년 11월 25일과 12월 2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임시협의회를 개최해 파리강화회의와 뉴욕의 소약속국동맹회의 대표를 선정하고 특별의연금 모금에 나서자, 20달러를 의연했다. 1919년 3월 1일 아동들에게 국어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맨티카에 한흥학교(韓興學校)를 열고 교장으로 활동했다.1929년 11월 멘티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후, 그 해 12월 1930년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나 사임하였다. 1930년 5월 22일 장인환이 사망하자, 『신한민보』에 「의사 장인환 공을 추도」(1930.6.12, 6.19)를 실어 추모하였다. 1930년 7월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의 하기강습 때 이종선과 함께 교사로 자원하여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만주사변 발발 직후인 1931년 11월 중부 캘리포니아주의 한인들이 공동회를 발기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 모금운동에 참여하였고, 이승만(李承晩)이 제네바에서 국제연맹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도 지원하였다. 『신한민보』 1937년 9월 2일자에 「국치 ‘기념’」이라는 글을 실어, 경술국치일을 3·1절 기념식과 같이 ‘기념’하는 것은 민족의 수치라고 주장하며, ‘기념’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 것을 주장했다.1940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맨티카로 이사하였고, 그 해 12월 25일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망국민으로서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자신을 슬퍼하며, 한인 동포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서를 남겼다. 오랜 동지였던 백일규는 『신한민보』 에 「고 문양목 선생을 추도」(1941. 1. 23)를 실어, 그의 죽음을 추모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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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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