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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19
성명
한자 元心昌
이명 元勳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1977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3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25부터 무정부주의 사회 실현 운동(無政府主義社會實現運動)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 6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 가맹, 1933. 3. 17 상해(上海)에서 동지(同志) 2명과 같이 일본(日本) 유길명(有吉明) 공사(公使) 폭살 의거(爆殺義擧) 직전(直前)피체, 1933. 11. 24 일본(日本) 장기지방재판소(長崎地方裁判所) 2(審)에서 무기징역(無期懲役) 선고를 받고 일본소재(日本所在) 형무소(刑務所)에서 복역 중 1945 칙령(勅令)의거(依據) 징역 20년으로 변경되어 12년 6개월의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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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그는 1926년 동지 이홍근(李宖根) 등과 함께 흑우회(黑友會) 재건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최초의 노동조합인 동흥노동조합(東興勞動組合)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5월 기관지 ≪흑우(黑友)≫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1927년 2월 흑풍회(黑風會)를, 1928년에는 흑우연맹(黑友聯盟)을 조직하였다. 1929년 4월 동경유학생학우회(東京留學生學友會) 폭력사건으로 징역 3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후 중국으로 건너가 1931년 6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였다.

1932년 11월 천진 일본영사관 일군병사(日軍兵舍)를 폭파하는데 참여하였으며 1933년 3월 1일 항일선전문을 등사하여 상해의 동포들에게 배포하여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년 3월 흑색공포단의 동지들과 회합하여 유길명(有吉明) 주중(駐中) 일본공사가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만주포기 및 열하지방(熱河地方) 대일부저항(對日不抵抗)을 책동하는 음모를 폭로·저지하는 대책을 모의하고 이강훈(李康勳)·백정기(白貞基) 등과 유길명을 처단할 목적으로 대기하던 중 현장에서 3명 모두 붙잡혔다. 1933년 11월 24일 일본 장기재판소(長崎裁判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33. 11. 24 장기지방재판소)
  • 고등경찰요사 163·16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197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7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54·155·825·826·833·835·83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51·6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81·782·784·78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448·452·45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원심창 원훈(元勳) 경기 진위 텐진(天津) 일본공사관 폭탄투척사건, 아리요시(有吉明) 주중일본공사 암살미수사건
본문
1906년 12월 1일 경기도 진위군 서면(西面) 안정리(安亭里, 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서 3형제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이명은 원훈(元勲)이다. 1914년 3월 평택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2월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14세 때인 1919년 4월 1일 부용면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 3월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22년 중퇴하고, 이해 12월경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갔다.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1925년 4월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학비 조달이 여의치 못하자 9월 자퇴하였다. 이때 무산학생학우회(無産學生學友會)와 동경조선무산자동맹(東京朝鮮無産者同盟)의 주요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나키즘에 대한 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고 1922년 말경 아나키즘 단체인 흑우회(黑友會)에 가입하였다.1926년 5월에는 장상중(張祥重)·육홍균(陸洪均)·김정근·정태성(鄭泰成)·한예상·최규종(崔圭淙)·이홍근·최규동·이원세 등과 도쿄 다카다정(高田町) 죠시가야(雜司谷) 431번지에 흑색운동사(黑色運動社)라는 간판을 걸었다. 7월 11일에는 일본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색청년연맹이 주최하는 무산정당비판박멸연설회에 조선인 대표로 연설하던 중 ‘불온언사’가 있다는 핑계로 체포되었다.1926년 7월 23일 박열(朴烈)과 함께 구속된 발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우쓰노미아 형무소(宇都宮刑務所) 고보노키 지소(枋木支所)에서 자살하는 옥사 사건이 발생하자, 최규종·육흥균 등과 진상 조사에 착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무소에서 관리하는 공동 묘지에 가매장된 유해를 발굴하여 화장한 후 박열의 선산인 문경에 안치하였다.1926년 11월 육홍균과 함께 흑색운동사를 흑색전선연맹(黑色戰線聯盟)으로 변경하고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단체인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에 가입하여 한·일 아나키즘운동의 공동전선을 형성하였다. 12월에는 장상중·이홍근·박망 등과 ‘박열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목적으로 흑색전선연맹을 불령사(不逞社)로 개편하고, 기관지 『흑우(黑友)』를 계속 발행하였다.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1927년 2월 흑풍회(黑風會)로 개칭하고, 조선노동총동맹계의 동흥노동동맹을 세포 조직으로 두었다. 2월 말에는 오우영 등과 별동대로 조선자유노동자연맹(朝鮮自由勞動者聯盟)을 조직하는 한편, 6월에는 우의(友誼)단체로 조선인신문배달인조합·조선자유노조연맹 고토부(江東部)와 야마노테부(山手部)·오사키(大崎)조선인일반노동조합 등을 산하에 설치하는 데 진력하였다.1926년 9월 10일 최낙종·김상렬 등과 조선인 위생인부를 결속시켜 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을 조직하고, 이홍근·장상중 등과 선전대에 편성되어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를 순방하면서 『자유사회(自由社會)』를 배부하였다. 그리고 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다카다부(高田部)와 치카부(千佳部) 지부를 두었다.1928년 1월 15일 장상중·한하연·이시우·최낙종·정태성 등과 흑풍회를 흑우연맹(黑友聯盟)으로 개칭하고, 기관지『호조운동(互助運動)』을 발행하여 조직과 선전을 강화하였다. 1927년 2월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 회원들이 자유노조연맹원의 일터에서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 일어나자, 흑우연맹원과 함께 1928년 2월 상애회 행동대장 하고봉(河古奉)을 응징하였다. 이에 상애회는 일본 경찰의 지원을 받아 권총·일본도 등으로 무장하고 흑우연맹과 아나키스트의 회의장소인 계림장(鷄林莊)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한하연 등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수명이 부상당하였다. 정당방위로 인정되어 무죄로 풀려났지만, 이해 5월 이혁과 재동경조선노동조합 북부지부를 습격하였다가 체포되었다.1929년 6월 7일 김병운·이시우·하경상·한하연·양성기·최복선 등과 동경유학생학우회가 민족주의계와 공산주의계 연합으로 춘계대운동회 개최를 협의하자, 좌우연합단체인 도쿄 신간회 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흑우연맹원 권상근이 사망하고, 신간회의 유원우·김기석 등 5명이 다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최복선·한하현·백병련·정진모·정찬진·유종기 등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1930년 4월 29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 이후 일제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1930년 중국 베이징(北京)을 경유하여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이후 1931년 6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同盟)에 가입하는 한편, 11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의열투쟁에 적극 참여하여, 1932년 12월 16일 텐진(天津)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1933년 3월 17일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중국 국민당 정부에 ‘만주 포기’를 종용하기 위해 국민당 주요 인사를 초청하여 육삼정에서 연회를 개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백정기·이강훈 등과 아리요시 처단을 시도하던 중 체포되어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이 사건은 ‘육삼정의거(六三亭義擧)’로 알려졌다. 후일 이강훈은 그를 “남을 위해 자기를 바치고 희생하려는 봉사정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찾을 수 없으리만치 독특한 마음씨의 소유자”라고 회고하였다.이후 나가사키(長崎)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가고지마(鹿兒島) 나카노 형무소(中野刑務所)에서 옥고를 겪던 중,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0월 10일 풀려났다.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46년 박열과 신조선건설동맹을 창설하고 부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이해 10월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창설하고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다.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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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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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상 원심창의사 동상 경기도 평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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