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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476
성명
한자 車敬信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3 훈격 애국장

관련정보


2013년 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 2월 경북(慶北) 영천(永川)에서 애국금(愛國金)을 모금하고 평남(平南) 평양(平壤)에서 김순애(金淳愛)와 만나 청년 50여명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시킨 후 동년 3월 일경(日警)의 추적을 피해 평북(平北) 의주(義州)로 가서 청년단(靑年團)을 조직하고 동년 11월 만주(滿洲)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김시점(金時漸), 김승만(金承萬) 등 15명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의 조직을 발기(發起)하여 총무(總務)선임(選任)되어 활동하였으며, 1920. 3. 1 평북(平北) 선천군(宣川郡) 소재(所在)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의 3.1운동(運動) 1주년기념(周年紀念) 만세시위(萬歲示威)를 주도하고 1920. 8월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투신(投身)하여 평남(平南) 순천(順川)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부인향촌회(婦人鄕村會)에서 모금한 의연금(義捐金)을 교부받아 임시정부(臨時政府)에 전달하였고, 1921. 9월 정애경(鄭愛敬), 최윤덕(崔胤德) 등과 함께 여자연합단(女子聯合團)의 대표로서 임시정부(臨時政府)독립운동(獨立運動) 자금(資金)을 지원하는 등 4년 11월간에 걸쳐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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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평북 선천(宣川) 사람이다.

1919년 2월에 일본 횡빈(橫濱)여자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중 동경에서 2·8독립선언 후 국제정세의 변화를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로 포착, 2천만 한민족이 일치단결하여 독립운동을 결행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를 결해하는데 있어 일반 여자들을 일깨워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큰 책임을 지고 김마리아와 같이 비밀리에 입국하여 대구(大邱)로 갔다. 이곳에서 김순애(金淳愛)와 서병호(徐炳浩)를 만나 장래 여성이 독립운동 참여를 위하여 부인회를 조직한 뒤 평북 선천(宣川)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이름으로 50여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행하였다. 이에 일경의 체포령이 있게 되자 피난 겸 벽촌으로 밀행하여 독립전쟁의 준비로 간호대(看護隊)를 조직, 붕대·가위·약품 등을 마련한 후 의주(義州)에서 청년단(靑年團)을 조직하고 반년간 활동하다가 군무에 필요한 기구를 주선하여 안동(安東)으로 향하던 중 일경에게 붙잡혔다가 석방되었다.

1919년 11월경에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의 총무겸 재무로 피선되어 국내외를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12월에는 국내 여성독립운동 상황을 시찰, 격려하고자 출발하여 모처에서 삼도여자총회(三道女子總會)를 열어 결속을 다졌다.

이듬해 1920년 3월 1일에는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소재한 보성여학교와 신성(信聖)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1920년 8월 하순, 보다 구체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安昌浩)를 도와 국내를 오가면서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1월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부인향촌회(婦人鄕村會)와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동년 9월 정애경·최윤덕 등과 여자연합단(女子聯合團)의 대표로 임정에 자금을 지원하였고, 10월 26일에는 평남 평양부 김상만(金相萬)이 모금한 4백여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조국독립운동을 뒷받침하는 자금조달에 일익을 담당하다가 1921년에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상해 홍십자(紅十字)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1924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초대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회장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로스앤젤레스에 한국어 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교포 자녀들의 교육에 진력하였다.

1931년 로스앤젤레스 한국어 학교 교장직을 사면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애국부인회 총본부가 로스앤젤레스로 옮기게 되자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애국부인회 총단장에 재임하면서 각지에 지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하였다. 애국부인회에서는 임시정부, 독립신문사, 광복위로금,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군축선전비, 만주동포구제금 그 외에도 국내 수재의연금, 혹은 고아원 원조비 등 독립운동과 구제사업을 위해 힘썼다.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조국광복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조달과 여성교육에 큰 몫을 담당했던 그는 1978년 9월 28일 로스앤젤레스 작은 마을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民族運動年鑑 78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分冊 708面
  • 領收證書(大韓民國臨時政府, 1921. 9. 3 發行)
  • 호박꽃 나라사랑(車敬洙, 1988. 4. 15) 129∼140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447·448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0卷 873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436·444·459·460·530面
  • 獨立新聞(1920.1.13, 1921.1.27)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차경신 이명 : 박경신(朴敬信) 평북 선천 3.1운동,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
본문
1892년 2월 4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선천읍 가물남(嘉物南)에서 미곡상을 하던 아버지 차기원(車基元)과 어머니 박신원 사이에 6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모친의 영향으로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였다. 미국에서 결혼한 뒤에는 남편 박재형(朴在炯)의 성을 따라 박경신(朴敬信)으로 불렸다. 1910년 선천읍의 장로교계 보성여학교를 졸업하고 4년 동안 강계(江界)의 명신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4년 서울의 정신여학교 사범과에 입학하여 1년 만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1915년 함흥의 영생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원산의 진성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육을 통한 여성 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191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요코하마(橫濱)여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도쿄(東京)에서 2·8독립선언이 일어나자, 국내에서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선배이자 평생의 동지인 김마리아를 만나 의논하였다. 요코하마 유학생 대표로서 도쿄 유학생 대표인 김마리아와 함께 2·8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기고 부친의 사망을 구실로 국내로 들어왔다. 김마리아와 함께 부산을 거쳐 대구로 갔다. 그곳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당수 서병호와 그 부인 김순애를 만난 여성단체 조직을 계획하였고, 경북 영천으로 가서 애국금을 모집하고 서울로 왔다. 다시 평양으로 내려가 김순애와 김경희를 만난 여성의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고향 선천으로 가서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회원 50여 명을 모집하고 선천지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산간 외지를 돌며 독립전쟁 준비 차원에서 간호대를 조직하고 붕대·약품 등을 마련한 후 의주에서 청년단을 조직하여 반년 동안 활동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11월 만주에서 조직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총무로 선임되어 평안도 지역에서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국내를 오가며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만주에서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이 일어나 모친 박신원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온 몸에 화상을 입는 참극을 당하게 되는 등 더 이상 활동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1920년 8월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였다. 상하이에서 도산 안창호를 도와 국내를 오가며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1월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와 연계하여 군자금 모집, 9월 정애경·최윤덕 등과 여자연합단의 대표로 임시정부에 군자금 지원, 10월 평양의 김상만이 모금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 등 국내 항일여성단체와 계속 연락하면서 군자금 모집과 연락망 구축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비밀리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결과 건강을 해쳐 상하이 적십자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1924년 1월 김마리아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가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와 교회주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샌프란시스코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3월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였으며, 안창호와 연계를 가지며 흥사단·대한인국민회·대한여자애국단 등에 소속되어 민족운동을 계속하였다. 1925년 안창호의 소개로 박재형과 결혼하였다. 1926년 로스앤젤레스에 국어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교포 자녀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또한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로스앤젤레스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중단했던 신학공부를 하고 1931년 졸업하였다. 이해 남편과 함께 잠시 귀국하여 가족 방문 등의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국어학교 교장을 사직하였다. 그때 샌프라시스코에 있던 대한애국부인회 총본부가 로스앤젤레스로 옮기게 되자,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미주지역 최초의 조국광복 지원을 위한 통합 여성단체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을 맡았다. 각지에 지회를 확대 조직하고 임시정부·독립신문사·구미위원부 등에 광복위로금, 군축선전비 등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만주동포구제금, 고아원 원조비 등 구제사업에 진력하였다. 1944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담하여 국방과장·재무 등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총부에서 재무 등을 맡아 계속 활동하였고, 1960년 자유당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기 위한 민주정권 수립 촉구 민중대회에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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