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02년 중국(中國)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양지사무소(量地事務所)에서 사무를 보는 한편, 1903년 간도(間島)의 한 사숙(私塾)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04년 귀국한 뒤 1905년 넷째형 경표(景杓)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하와이 노동이민 후 가와이섬 막가윌리 사탕농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1906년 6월 송건 등과 함께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고, 이듬해인 1907년 9월 동포들의 실력 양성과 교육 장려를 위해 활동하였다.
1907년 9월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되었던 24개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서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여 하와이의 모든 단체를 망라하는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조직하고 동년 10월 기관지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를 창간하자 동 기관지의 주필로 임명되어 1909년 1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또한 1909년 2월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미주의 공립협회(共立協會)가 해외 한인의 통일기관을 설치하기 위해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자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임명되었으며, 1911년 11월에는 미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주필로 선출되는 등 1908년부터 약 4년 동안 신문을 제작․발행하여 조국의 국권회복과 한인동포들의 안녕 보장 및 민족교육 장려, 문맹퇴치운동,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헌신하였다.
1912년 11월 해외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中央總會)가 결성되자 국민회 만주지방총회(滿洲地方總會) 대표 대리로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1913년 5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종익(宋鍾翊) 등 8명과 함께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여 흥사단 창립발기 위원 겸 경기도 위원으로 선정되어 민족 장래에 동량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해 활동하는 한편, 국민회의 핵심간부인 이대위(李大爲) 목사·백일규(白一圭) 등과 더불어 「신한민보」를 이끄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1919년 3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조국의 3·1독립선언 소식을 듣고 재미동포를 총동원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고자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동포 전체대표회를 개최하고 운동방침을 결정하는 한편, 화교위원(華僑委員)으로 임명되어 중국인 사회에 한국의 독립사상 선전 사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1920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서기 및 「신한민보」편집인으로 임명된 그는 미주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서부지역을 돌아다니며 화교들을 상대로 연조(捐助) 청구활동을 전개하여 국민회 운영자금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은 그의 활동에 따라 구미위원부에서도 화교를 상대로 하는 수입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1920년 6월 그를 구미위원부 화교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1921년 1월 캐나다 서부지역을 순회한 것을 비롯하여 동년 6월에는 파나마·에쿠아도르·페루·칠레 등 중남미 화교들을 방문하는 등 1년 6개월 간 자금후원 활동을 전개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을 마련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22년 6월 샌프란시스코로 귀환한 그는 다시 국민회 순행위원(巡行委員)으로 캘리포니아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회비와 연조를 청구하였다.
1923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무로 선임되어 회의 재정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1924년에는 김현구(金鉉九)·최진하(崔鎭河) 등과 함께 이문회(以文會)라는 문예창작그룹을 조직하여 그의 문재(文才)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6년 6월 미국을 떠나 약 1년간 멕시코를 돌아다니며 잡화(雜貨)와 인삼행상을 하였으며, 1928년 이후에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김구(金九)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후원하였다.
1931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중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을 통해 한·중(韓中) 합작을 제창하며 항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 고려통신사(高麗通信社) 명의로 한국혁명운동과 인물들을 소개하여 미주와 해외 각지에 있는 중국 화교들로부터 큰 칭송을 받아 『미국화교사(美國華僑史)』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될 정도로 평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1933년 5월 김규식(金奎植)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였을 때, 그를 주선하여 중한민중대동맹삼번시지부주비처(中韓民衆大同盟三藩市支部籌備處)를 조직하게 하고 삼번(三藩)주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 지도자들과 김규식을 회동하게 하는 등 화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 후 1935년부터 1936년 중국 화교들의 초청으로 각지의 화교 사회를 순방하였으며, 1936년 5월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代表者會議)에 참석하여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하였다. 또한 1940년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해, 28년 만에 「신한민보」의 주필 자리를 다시 찾아 3년 동안 그의 문재를 마음껏 발휘하였다.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고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동년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하자 그해 10월 로스엔젤레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 참석하여 서기로 선출된 그는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개조 인선작업에 참여하였다.
1945년 다시 「신한민보」주필에 임명된 그는 약 4년 동안 활동을 펼치다 1949년 붓을 놓는다고 선언하였다. 그 후 1951년 3월 25일에 미국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498, 514, 518, 522, 523, 662, 673, 674, 680, 681, 684, 711, 758~761, 811, 824, 846면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121․122․129면
- 재미한인의 독립운동(방선주) 259~30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12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21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