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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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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洪焉
이명 洪宗杓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1년 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6~1911년 하와이에서 자강회(自强會),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 국민회(國民會)에 관계하여 『자강회월보(自强會月報)』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 『신한국보(新韓國報)주필(主筆)역임(歷任)하였고, 1911~1945. (美) 본토(本土)에서 대한인국민회원(大韓人國民會員)으로 활동하여, 1912년 만추리 지방총회 대표 대리, 1920, 1921년 화교(華僑)에게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위원, 1923년 총무(總務), 1931년 부회장(副會長) 등으로 활동하였고 1913년 흥사단(興士團)의 창림멤버로 흥사단 경기도 대표가 되었고, 1944년 주미외교위원부 서기(書記), 『신한민보(新韓民報)주필(主筆) 등으로 일평생(一平生) 독립자금 모집(獨立資金募集)애국정신(愛國情神)고취하는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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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02년 중국(中國)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양지사무소(量地事務所)에서 사무를 보는 한편, 1903년 간도(間島)의 한 사숙(私塾)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04년 귀국한 뒤 1905년 넷째형 경표(景杓)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하와이 노동이민 후 가와이섬 막가윌리 사탕농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1906년 6월 송건 등과 함께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고, 이듬해인 1907년 9월 동포들의 실력 양성과 교육 장려를 위해 활동하였다.

1907년 9월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되었던 24개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서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여 하와이의 모든 단체를 망라하는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조직하고 동년 10월 기관지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를 창간하자 동 기관지의 주필로 임명되어 1909년 1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또한 1909년 2월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미주의 공립협회(共立協會)가 해외 한인의 통일기관을 설치하기 위해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자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임명되었으며, 1911년 11월에는 미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주필로 선출되는 등 1908년부터 약 4년 동안 신문을 제작․발행하여 조국의 국권회복과 한인동포들의 안녕 보장 및 민족교육 장려, 문맹퇴치운동,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헌신하였다.

1912년 11월 해외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中央總會)가 결성되자 국민회 만주지방총회(滿洲地方總會) 대표 대리로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1913년 5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종익(宋鍾翊) 등 8명과 함께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여 흥사단 창립발기 위원 겸 경기도 위원으로 선정되어 민족 장래에 동량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해 활동하는 한편, 국민회의 핵심간부인 이대위(李大爲) 목사·백일규(白一圭) 등과 더불어 「신한민보」를 이끄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1919년 3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조국의 3·1독립선언 소식을 듣고 재미동포를 총동원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고자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동포 전체대표회를 개최하고 운동방침을 결정하는 한편, 화교위원(華僑委員)으로 임명되어 중국인 사회에 한국의 독립사상 선전 사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1920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서기 및 「신한민보」편집인으로 임명된 그는 미주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서부지역을 돌아다니며 화교들을 상대로 연조(捐助) 청구활동을 전개하여 국민회 운영자금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은 그의 활동에 따라 구미위원부에서도 화교를 상대로 하는 수입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1920년 6월 그를 구미위원부 화교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1921년 1월 캐나다 서부지역을 순회한 것을 비롯하여 동년 6월에는 파나마·에쿠아도르·페루·칠레 등 중남미 화교들을 방문하는 등 1년 6개월 간 자금후원 활동을 전개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을 마련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22년 6월 샌프란시스코로 귀환한 그는 다시 국민회 순행위원(巡行委員)으로 캘리포니아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회비와 연조를 청구하였다.

1923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무로 선임되어 회의 재정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1924년에는 김현구(金鉉九)·최진하(崔鎭河) 등과 함께 이문회(以文會)라는 문예창작그룹을 조직하여 그의 문재(文才)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6년 6월 미국을 떠나 약 1년간 멕시코를 돌아다니며 잡화(雜貨)와 인삼행상을 하였으며, 1928년 이후에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김구(金九)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후원하였다.

1931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중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을 통해 한·중(韓中) 합작을 제창하며 항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 고려통신사(高麗通信社) 명의로 한국혁명운동과 인물들을 소개하여 미주와 해외 각지에 있는 중국 화교들로부터 큰 칭송을 받아 『미국화교사(美國華僑史)』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될 정도로 평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1933년 5월 김규식(金奎植)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였을 때, 그를 주선하여 중한민중대동맹삼번시지부주비처(中韓民衆大同盟三藩市支部籌備處)를 조직하게 하고 삼번(三藩)주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 지도자들과 김규식을 회동하게 하는 등 화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 후 1935년부터 1936년 중국 화교들의 초청으로 각지의 화교 사회를 순방하였으며, 1936년 5월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代表者會議)에 참석하여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하였다. 또한 1940년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해, 28년 만에 「신한민보」의 주필 자리를 다시 찾아 3년 동안 그의 문재를 마음껏 발휘하였다.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고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동년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하자 그해 10월 로스엔젤레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 참석하여 서기로 선출된 그는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개조 인선작업에 참여하였다.

1945년 다시 「신한민보」주필에 임명된 그는 약 4년 동안 활동을 펼치다 1949년 붓을 놓는다고 선언하였다. 그 후 1951년 3월 25일에 미국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498, 514, 518, 522, 523, 662, 673, 674, 680, 681, 684, 711, 758~761, 811, 824, 846면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121․122․129면
  • 재미한인의 독립운동(방선주) 259~30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12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21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홍언 본명 : 종표(宗杓) , 호 : 동해수부(東海水夫), 해옹(海翁), 추선(秋船) 서울 -
본문
1880년 (음)2월 27일 부친 홍학순(洪淳學)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6형제 중 다섯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호는 동해수부(東海水夫), 해옹(海翁)과 추선(秋船)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초명은 홍종표(洪宗杓)였으나 미주에서 홍언(洪焉)으로 개명하였다. 영어이름은 리처드 홍이었다. 다만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81년생으로 추정된다. 흥사단 이력서에 의하면 10대 후반까지 10년을 가정에서 수학하고 1894년부터 1902년까지 경기 광주(廣州)와 강원 춘천(春川)에서 거주하였으며, 1902년부터 1904년 동안 중국 각지를 다니며 1902년 양지사무소(量地事務所)에 관여하고 이후 사숙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1904년 9월 16일 게릭호(Gaelic) 편으로 혼자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왔는데, 넷째 형인 홍경표가 그보다 1개월 반 먼저 도착해 있었다. 1907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대한자강회 포와부(布哇府) 지회월보』의 편집을 맡기 시작하여 이후 『자신보(自新報)』와 『합성신보(合成新報)』, 『신한국보(新韓國報)』의 편집을 맡았다. 1908년 기독교 세례를 받았으며, 기독청년회 활동도 하였다. 하와이에서는 자강회와 한인합성협회-국민회-대한인국민회로 이어지는 단체에 관여하였다. 1911년 8월에는 『대동위인 안중근전(大東偉人安重根傳)』을 저술하여 신한국보사에서 발행하였다. 이 안중근 전기는 16면에 걸쳐 생애와 의거, 재판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는데, 국문으로 작성되었다. 이어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에 선임되어 미주 본토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12월에는 북미지방총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러시아와 유럽을 거쳐 미국에 돌아온 안창호(安昌浩)를 만났다. 신한민보사 주필 또는 기자로서의 활동은 신문사나 개인 사정으로 여러 차례 중단되기도 하지만,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13년에는 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桑港한인감리교회)의 청년회 회장직을 맡았고, 북미지방총회 대의회 의장으로도 활동하였다. 신한민보사의 직임을 사임한 뒤에도 기사를 집필하며 북미지방총회 일을 병행하였다. 또한 안창호가 추진하던 흥사단(興士團) 창립에도 적극 관여하여 창립위원장을 맡고 경기도를 대표한 제7단우로 참여하였다. 1915년 초부터 다시 신한민보사의 편집원이나 주필로 근무하여 1918년 말까지 재임하였고, 북미지방총회 총무직도 겸하였다. 신한민보사를 사임한 후에는 1919년 3월부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중화인(中華人)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어 화교(華僑)를 대상으로 독립자금 모금에 나섰다. 1921년 6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구미위원부 화교위원으로 임명되어 페루·칠레·에콰도르·자메이카 등 중남미지역을 순행하며 그곳 화교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거두었다. 1924년 전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가 같은 해 12월 일시 미국에 돌아온 안창호와 재회하였고, 계속 『신한민보』에 기고하였다. 1925년 말 흥사단 사업과 관련된 일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1926년부터 1년간 중남미를 돌며 상업 활동을 하였다. 1930년 전후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대동단결을 내세우며, 미주 한인단체의 통합운동에도 진력하여 1931년 미주한인연합회에도 적극 참여한 바 있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에서 윤봉길(尹奉吉) 의거가 있었고 안창호가 일제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창호는 1931년 11월 6일자로 홍언에게 흥사단의 장래와 독립운동방략을 논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만주사변 이후 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대당(大黨) 조직과 한중(韓中) 합작을 강조하며, 동지·이론·재정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안창호의 의견에 동조한 그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화교를 대상으로 한중합작을 주장하는 논설을 화교신문에 발표하였다. 이후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ㆍ호주ㆍ쿠바ㆍ멕시코 등지의 화교들에게도 문명(文名)을 널리 알려 미국 각지 화교의 초청을 받기도 하였다. 1938년 3월 안창호가 국내에서 서거하자 『영애록』을 편찬하였으며, 로스앤젤레스로 옮긴 신한민보사의 편집 직원으로 상근하였다. 1940년 1월 다시 신한민보사의 주필에 선임되었으며, 위원제로 바뀐 대한인국민회 대표회 서기와 중앙집행위원 겸 서기, 중앙상무위원도 함께 수행하였다. 1940년대에 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의 활동을 널리 소개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943년 6월 신한민보사 주필직 사임을 청원하자, 국민회 중앙상무부는 그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명예기자로 선임하여 국민회의 기록존안과 통신사무를 맡기며, 『신한민보』의 편집에 협조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에 진력하여 『신한민보』 1944년 2월 3일자부터 1945년 3월 1일자까지 「국민회 략사」를 총 52회 연재하였다. 1945년 2월 다시 신한민보사의 편집을 맡고 9월부터 주필을 맡았다. 1910년대부터 시조와 소설·기행문·희곡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학작품과 사설·논설·칼럼·기사·번역 등을 『신한민보』에 발표하였다. 아울러 역사와 전기에 깊은 관심을 두어 『대동위인 안중근전』을 저술한 이후에도 이갑(1918)·윤봉길(1937)·이동녕(1940)·김구(1940) 등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선교사 사무엘 모페트(1938) 등의 전기도 발표하였으며, 국민회의 역사 정리에 진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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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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