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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3월 3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부산면(斧山面) 용궁리(龍宮里)에서 상업을 하던 아버지 영순(榮順)과 어머니 오인선(吳仁先) 사이에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양에서 1902년까지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3년부터 1906년까지 중학을 다녔다. 중학 졸업 후부터 1908년까지 평양 광성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1908년 1여 년간 대학을 다녔다. 1909년 가족과 함께 전북 전주군 서문면(西門面) 화산리(華山里)로 이사하여 1909년부터 1913년까지 전주 신흥학교 교사, 1914년부터 1916년까지 3년간 신학을 공부하면서 전주군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16년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단신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가는 차이나(China)호를 타고 9월 30일 26명의 한인들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 이민국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10월 초 상륙하였다. 10월 27일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에서 제1회 샌프란시스코학생회(Korean Student Club)가 개최되자, 이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1917년 1월 8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산하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하자마자 서기로 선출되었다. 6월 북미지방총회 법무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7월과 9월에는 샌프란시스코한인엡윗청년회에서 생리학으로 강연하였다. 또한 7월 흥사단 예비 제2반에 복무한 뒤 10월 9일 정식 입단하여 73단우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8월 북미지방총회 소유 가옥의 은행 채무를 갚기 위한 은행채(가옥채)보상 발기자를 모집하자 제2회 발기인이 되었으며, 12월 하순에는 북미지방총회와 총회 기관지 신한민보사(新韓民報社) 사무원으로 내정되어 1918년도 북미지방총회와 신한민보사 관련 사무를 챙겼다. 1월 프란시스코한인교회 청년회 전도국장으로 선출되었고, 7일에는 북미지방총회 구제원으로 선임되었다.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국어학교 재정을 후원하였고, 3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서기로 선출되었다. 11월 국민회 중앙총회와 북미지방총회 임원 등 20여 명이 모여 시국문제를 협의하고 파리강화회의와 뉴욕소약국동맹회에 대표자를 파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특별의연금 모집을 위한 임시위원회를 조직하자 7인의 위원 중 1인으로 선정되었다.
1919년에도 북미지방총회 총무로 모든 사무를 총괄하였다. 1월 북미지방총회 제10차 대의원회에 참석하여 국기(國旗)의 표본을 만들어 반포하고, 국치기념적립금 모집, 교육기관인 버클리와 클래몬트양성소 경비 지출, 국어학교 보조, 자치규정 변경 등을 의결하였다. 2월 1일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국민회 역사’로 연설하였으며, 7월 초부터는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대리 임정구를 대신하여 총회장 대리로 회의 업무를 이끌면서 지방총회 산하 각 지방회에 일본상품(日貨) 배척과 일본인과의 교제 금지를 재차 훈시하였다. 8월부터 대한적십자회 회원을 모집하고 12월 대한적십자회 북미지부를 조직하여 서기 겸 재무로 활동하였다. 11월 20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회장 강영소(姜永韶)와 1920년도 국민회를 이끌게 되었다. 또한 재정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임시정부의 군사 및 외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920년 『신한민보』 발행을 위해 식자기계를 담당하는 한편, 8월에는 캘리포니아주 일대 한인동포들을 순방하는 등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면서 10월에는 앓아눕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담당했던 신한민보 발행이 한동안 중단되기도 하였다. 10월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金奎植)이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공채를 모집하자, 구미위원부 샌프란시스코지방위원부 임시 재무가 되어 공채 모집에 힘썼다. 11월 대한적십자회 회원을 지속적으로 모집하는 한편, 11월 북미지방총회 12차 총선거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2월 12일 총회장 취임식 거행과 함께 대의원회를 소집하여 교과서 편찬과 국어학교 장려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워 실천하였다. 이와 함께 지방총회 총무부 내에 선전부를 설치하는 등 외교 사무도 강화하였다. 12월 21일에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으로부터 1919년 북미지방총회에서 반포한 국기(國旗) 표본이 각기 다르니 정확한 표본을 가르칠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받기도 하였다.
1921년 1월 구미위원부 위원장 대리 현순(玄楯)으로부터 구미위원부 재정 마련을 위한 가주(캘리포니아주) 시찰위원으로 임명되어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제가 자행한 ‘간도참변(間島慘變)’에 희생당한 동포들을 구제하기 위해 ‘간도참상 구제에 대하여’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구제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31일에는 총회 임원회를 열고 초등 교과서 편찬을 위한 편찬위원과 교열위원 등을 선임하였다. 3월 미국 대통령 하딩의 취임 축하 전보를 보내 대통령 비서관으로부터 감사의 답장을 받았으며, 하순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와 함께 선전기관 설치를 포고하였다.
1921년 여름 워싱턴회의가 11월 개최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7월부터 9월까지 김현구(金鉉九)와 워싱턴회의에서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논설을 발표하고 파견 대표에 대한 경비 마련과 모금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이와 함께 임초(林超)와 함께 직접 캘리포니아주 일대 한인동포들을 방문하며 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기도 하였다. 10월 스탁톤에서 개최된 감리교지방회 연례회에서 샌프란시스코교회 전도사 업무를 위임받았다. 12월에는 추진했던 교과서가 발간되는 성과가 있었다.
1922년 총회장직을 벗어나자, 관심을 기울이던 국어학교 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국어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4일 북미총회장으로 당선되어 1923년부터 1925년까지 3년간 총회장으로 북미총회를 이끌었다. 한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폐지되자, 1923년 1월 14차 대의원회를 개최하여 대한인국민회 헌장을 개정하여 회의 명칭을 대한인국민회총회로 개편하였다.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한인엡윗청년회 학무국장으로 선임되었고, 5월에는 미국에 민립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민립대학후원회취지서」를 발표하고 북미민립대학기성후원회 발기인이 되었다. 9월 한국에서 참혹한 수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내지에 참혹한 수재 구제에 관한 사건」이란 공문을 발표하여 수재의연금 모집을 주도하였으며, 11월에는 일본 도쿄(東京) 등지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희생당한 한인들을 위해 「진재 동포 동정금 수합에 관한 건」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의연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11월 21일 제15회 국민회 총선거에서 차기년도 총회장으로 연속 당선되자, 1924년에도 대한인국민회총회 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흥사단 의사부 의사원으로도 활동하면서 4월에는 홍언(洪焉)·백일규(白一圭)·김현구 등과 함께 이문회(以文會)라는 문예그룹을 조직하여 문재(文才)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5월 북미민립대학기성회후원회 평의원 선거에서 백일규·장인환(張仁煥) 등 9인과 함께 평의원이자 재무 겸 서기로 선출되어 부진한 민립대학 설립 기금 마련에 힘을 쏟았다. 6월 독일 고려학우회 서무원 이극로(李克魯)에게 생활이 어려운 독일 유학생들의 자금으로 270달러를 송금하였고, 11월 국민회총회 선거에서 다시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3년째 업무를 맡게 되었다. 12월 16일 안창호(安昌浩)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다음 날 안창호환영회를 주최하였고, 같은 달 하순에는 그동안 재정 곤란으로 발간하지 못한 대한인국민회헌장을 사비를 털어 발간하여 각 지방회에 나누어 주었다.
1925년 3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박은식(朴殷植)이 구미위원부를 폐지하면서 일체 사무와 재정 모금 등을 국민회 총회에 위탁 인계한다고 통지하였고,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규홍(李圭洪)으로부터 미주와 멕시코·쿠바지역 재정징수위원으로 임명되었다는 위임장을 받았다. 이에 미국을 포함한 멕시코·쿠바 한인들로부터 인구세를 거둬 임시정부 재무부로 지속적으로 송금하였다. 같은 해 5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주미외교위원장(駐美外交委員長)으로 임명되자, 주미외교위원부를 샌프란시스코에 설치하고 업무를 보았다.
1926년 총회장에서 물러나자, 그동안 하지 못한 대학공부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일한(柳一韓) 등이 조직한 ‘유한주식회사’ 총무로 초빙하자, 학업을 미루고 1월 27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미시건주 디트로이트로 갔다. 이후 디트로이트의 유한주식회사에서 총무로 일을 하였다. 그러나 9월 13일 유한주식회사 주주총회를 끝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적지 않은 재정 손해와 채무 등으로 과로한 끝에 1928년 6월 병원에 입원하여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하였다. 이후 4년간 시카고 지역 병원과 휴양원 등에서 치료와 정양(靜養)을 하다가 1932년 10월 시카고 휴양원에서 퇴원하였다. 그러나 퇴원한 지 두 달 만인 12월 국민회 총선거에서 총회장 후보자로 선정되자, 대의원들에게 총회장 후보를 원치 않는다는 뜻을 알렸다.
1933년 2월 시카고지방회 주최 국민회 창립기념식에 참석하여 연설한 것을 시작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해 5월 「김규식 박사의 사명」이란 글을 기고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후원을 촉구하고 김규식을 만났다. 이 글을 시작으로 6월 「인플레이션」, 8월 「미국의 신기원」, 9월 「상품화」, 11월 「사업형편과 새 재정책」 등 루즈벨트의 경제정책을 분석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1934년 5월에는 애리조나주 피닉스(Phoenix)에서 한국서 수입한 금로향(金露香), 천진고(天眞膏)라는 약 판매대리인이 되었다.
1935년 2월 다시 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뒤 3월 21일 총회장 취임식을 갖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5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중앙집행위원회의 요청으로 6월 개최될 혁명단체 대표대회에 차리석을 대표원으로 선정 통보하였고, 9월에는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평신도 대표가 되었다. 1936년 1월 다시 총회장에 당선되자 4월 국민회 대의원회 의결로 각 지방에 국민회 청년부 조직을 적극 권고하는 한편, 화재로 파손된 국민총회관을 수리하였다. 5월 9일 로스앤젤레스공동회 김성권(金聲權)·송헌주(宋憲澍)·김병연(金炳淵), 중가주공동회 김호(金乎)·이살음(李薩音) 등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한인사회 발전책을 논의하였다. 같은 달 17일 캘리포니아주 대표 20여 명을 로스앤젤레스로 소집하여 재미한인사회 발전책 유지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그해 7월 국민회총회 특별대의원회를 개최하고 헌장을 수정하여 임원제도를 위원제로 변경하는 한편, 2세 한인을 위한 국어학교 설립, 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인구세 명시, 로스앤젤레스로 국민총회관 이전과 건축 등을 결정하였다. 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8월 로스앤젤레스 등 캘리포니아주 각지를 순행하며 의무금, 신한민보 대금, 총회관 건립기금 등을 모집하였다. 9월 한인감리교회 지방회에서 평신도 대표로 선정되었고, 10월 김호와 함께 몬타나주 뷰트를 방문하여 지방회를 설립하였으며, 1936년 11월 19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재무부 주미제3행서(駐美第3行署) 재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7년 1월 신헌장에 의해 개최된 국민회 총선거 제1차 대표대회에서 김호가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총회관 소재지에 거주하지 않는 관계로 국민회 중앙상무위원회 총무로 선임되어 신두식과 함께 총회관 실제 사무를 집행하였다. 또한 1936년부터 쿠바 하바나 한인들에게 지방회 설립을 권유하여 1937년 2월 국민회 하바나지방회 설립을 이뤄냈고, 4월경에는 국민회 지방회 16개를 부활시켰다. 7월 제3계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에 따라 경상비 관리를 맡아 각 지방을 순행하고 회무를 시찰하는 동시에 회금 모집업무를 지속하였다. 8월에는 집행위원장 김호와 중일전쟁에 대한 시국대책을 협의한 뒤 중앙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임시정부에 인구세를 송금하는 한편, 9월부터 매달 100달러를 임시정부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9월 제4계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중국항일전쟁 후원금 모집,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후원을 위한 민족운동준비적립금 등 1,000달러 즉시 송금, 임시정부 후원 특별의연금 모집, 중일전쟁에 따른 국민부담금 신설 모집 등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중국항일전쟁 후원금 모집을 독려하는 한편, 캘리포니아 한인사회를 돌며 각종 후원금을 모집하였다. 이런 그의 노력 등으로 중국항일전쟁 후원금 750달러가 모이자, 10월 샌프란시스코 주재 중국총영사에게 송금하였고, 2차로 모집된 100달러 80센트를 11월 주미화교통일의연구국총회로 전달하였다. 이와 함께 국민총회관의 로스앤젤레스 이전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38년에도 국민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회 총무로 재선되었으며, 1월에는 생계를 위해 배일진·양의성 등과 식물 및 생선 판매업을 시작하였다. 4월 그동안 추진한 국민총회관 낙성식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하였고, 9~10월에는 제3계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에 따라 원동특파원 파견을 위해 캘리포니아주 각지를 돌며 원동특파원 대표 선정 작업과 함께 경비 모집위원을 위임하였다. 11월에는 국민회 산하 시사위원회를 주관하고 국민회 발전책과 재미한인 활동 방침을 연구할 것을 결정하였다.
1939년에도 국민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회 총무가 되어 3년째 연임하는 한편, 『신한민보』 주필까지 겸임하였다. 3월 중앙상무위원회 결의로 500달러를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송금하였고, 5월에는 국민회 산하 국어교과서편찬위원회 편찬원 27인 중 1인으로 선정되었다. 이즈음 변준호(卞俊鎬) 등 나성한인연합중국후윈회가 국민회에 로스앤젤레스 한인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후원할 것을 요청하자, 6월 중앙상무위원회를 열어 논의한 결과,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즈음 중앙집행위원회에 사임서를 제출하였으나 9월까지 연기되었다.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장 송병조(宋秉祚)가 긴급 재정 지원을 요청하자, 500달러를 송금하는 한편 각 지방회에 공문을 보내 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부담금과 인구세 모집을 요청하였다. 9월 제3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그의 사임서를 승낙하였으나 후임자가 없는 탓에 계속 근무할 수밖에 없었다.
1940년 1월 제4차 대표대회에서 총무를 그만두었으나 11인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샌프란시스코에서 홍삼·백삼·육신환 등 약재와 식물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국제무역을 시작하였다. 4월 제1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중앙집행위원을 사임하였고, 11월 1년간 활동이 중지된 새크라멘토지방회 임원선거에서 집행위원 겸 상무위원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1942년 9월 새크라멘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지방회에서 활동하였다. 1943년 11월 로스앤젤레스지방회 1944년도 임원선거에서 집행위원 겸 대표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2월에는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2월 29일 국민회 제8차 대표대회에 로스앤젤레스지방회 대표원으로 참석하여 31일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회 청년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4년 4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고추장·된장·간장 등 사업을 하였고, 11월 로스앤젤레스지방회 명년도 임원선거에서 선전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2월에는 곤쟁이젓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12월 23일 국민회 제9차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고 26일 중앙상무위원회 청년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5년 4월 1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최로 열린 해외한족대회에 오레곤주 포틀랜드 대표 대리로 참석하는 등 해방될 때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사업과 국방 후원, 한인 동포의 전시 안녕보장 등에 힘을 쏟았고, 임시정부와 광복군 편성을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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