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평남 강서(江西) 사람이다.
1916년 1월 조국의 독립과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망명하여 윌로우스지방의 대학에 재학하던 중, 1919년 9월 캘래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학생친목회(韓人學生親睦會) 유학생대표회(留學生代表會)가 개최되어 각 지방에 산재한 학생들과 학생회를 규합하고 한인학생 전체를 대표할 통일기관을 결성하기로 합의하자, 그 목적에 찬동하여 1920년 4월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지방 대표로 학생총회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총회결성발기자회(總會結成發起者會)를 조직하고, 미주 학생들의 친목과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0년 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 노백린(盧伯麟) 등이 중국내 항일독립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 지방에 비행사양성소(飛行士養成所)를 설립하자, 학생으로 입소하여 5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둔전병식(屯田兵式) 군대교련을 받으면서 항일무장투쟁 의지를 굳건히 하였다.
그 후 1939년 10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변준호(卞俊鎬) 등과 함께 중국피난민후원회(中國避難民後援會)를 조직하였으며, 1941년 2월에는 동 후원회를 변경하여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미주후원회(美洲後援會)를 조직하고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소장파들이 중국 한구(漢口)에서 결성한 조선의용대의 중국군대 후방공작을 후원하였다. 이후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편입함에 따라 1943년 1월 동 조직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미주지부(美洲支部)로 개칭하였으며, 동년 9월 기관지 「독립(獨立)」을 창간하여 중국내 김원봉(金元鳳) 계열의 정치운동노선을 적극 후원·지지하였다.
한편,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고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를 조직하자, 그가 소속한 조선의용대 미주 후원회 역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민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활동하자 재민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동년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하자, 그 해 10월 로스엔젤레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동 대회의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대표로 참석한 그는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개조 인선작업에 참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0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403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5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741·742면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35·36·221∼223·350·436·43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22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604·60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631·735·736·804·805·84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