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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하와이로 건너가 하와이 성공회 전도사로 일하며 성공회 개척자로 활동하였고 세탁소 등으로 성공한 실업가이다. 부인은 장금순(미국명 조매리)이며, 딸 김진옥, 수양딸 양마타, 외손녀 재키 영이 있다.
대한제국 말기 양반 출신으로 관리로 근무하다가 1904년 2살 연하의 부인 장금순과 함께 하와이에 도착하여 마우이섬 사탕농장에 배치되어 일하였다. 다만, 『신한민보』에는 1902년 이민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농장에서 일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시점에 호놀룰루에 있는 이올라니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이민국 서류업무를 도우며 통역사로 일하였다. 한편, 하와이 이민국 입국 기록에 1904년 8월 22일 Cho Pyeng Ye 부부가 캅틱(Captic) 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동일인 여부는 불분명하다. 1904년 말 하와이 한인성공회 교인들은 세인트 앤드류 성당(St. Andrew’s Cathedral)의 부속 건물인 성 누가(세인트 룩)에서 공동 예배를 보았는데, 이 예배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1907년 7월 한국에서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국군 강제 해산 등을 계기로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9월 2일 하와이 24개 단체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창립하였다. 한인합성협회가 창립된 다음날인 9월 3일 호놀룰루에서 김익성(金翊成)·박상하(朴相夏)·최병현 등 성공회(聖公會) 교인들과 ‘충성을 다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목적으로 전흥협회(電興協會)를 결성하고 창립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전흥협회 회원들은 1908년 5월 23일부터 매월 속쇄판으로 『전흥협회보(電興協會報)』를 발행하여 문맹퇴치운동에 공헌하였다. 그 후 1909년 1월 25일 한인합성협회에 통합되었고, 한인합성협회는 같은 해 2월 북미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통합하여 재미한인의 통일기관인 국민회(國民會)를 창설하고 하와이지방총회가 되었다.
1909년 2월 하와이지방총회 재정조사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3월 하와이지방총회 산하 푸나호우지방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6월 푸나호우지방회 부회장이자 대의원·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 9월 호놀룰루지방회와 푸나호우지방회가 통합되어 호놀룰루지방회로 개편되자, 호놀룰루지방회 부회장 겸 대의원이 되었다.
1914년 1월과 2월 하와이지방총회 호놀룰루지방 참의원, 하와이지방총회 법무로 선임되었고, 6월에는 본래 성공회 계열 학교였던 이올라니학교의 하기학교(섬머스쿨) 학생이 되었으며, 이태성 등과 더불어 해산된 하와이코리안야구대를 다시 조직하여 총리가 되었다. 1918년 4월 하와이연합중앙회에서 독립하여 팔라마지방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921년 10월에는 대조선국민대표기성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출되었다. 1923년경에는 하와이 이민국 수시통역으로 활동하면서 팔라마국어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25년 1월에는 호놀룰루 노스 져드 거리(North Judd St)에 성공회 교당을 세워 헌당식을 갖는 등 교당 건립을 주도하였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 주석 김구로부터 임시정부가 재정 부족으로 매우 곤란한 형편에 있다는 편지를 받고 하와이 동포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1928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대한인교민단과 대조선독립단 인사가 합동하여 대한민족통일촉성회를 조직하고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자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4년 4월에는 김구의 특무공작 지원을 위한 애국단(愛國團)에 참여하여 애국단 사업을 확장하였고, 10월 15일 대조선독립단과 국민회의 합동을 의결하고 21일 합동축하회에 참석하여 ‘국민회 정신’을 연설하였다. 1935년 1월 국민회 재무로 선임되었고, 10월에는 국민회와 동지회 간의 화합을 위한 중개자로 나서 양 단체 대표를 초청하여 두 단체의 통합을 정식 제기하였다.
1936년 1월 하와이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1944년까지 9년간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36년 1월 총회장 취임 직후 국민회 부채 청산과 교과서 출판, 임시정부 후원, 경제기관 설치를 당면과제로 선정하여 이를 실천해 나가면서 국민회를 부흥,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1937년 1월 국민회 총회장과 기관지 『국민보(國民報)』사 사장이 되자, 2월 총회장 취임과 함께 국민총회관 부채 청산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총회관의 빚을 다 청산하는 한편, 하와이 한인30년사를 편찬하기 위한 역사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호놀룰루 천도교회 종리원에서 천일(天日, 동학교주 최제우가 천도를 받은 날) 경축식을 거행하자 ‘광제창생(廣濟蒼生)’이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국민회 대표로서 미주의 카우아이(Kauai) 대한인단합회, 하와이애국단 등과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을 결성하였고, 8월에는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을 위해 특별운동으로 혈성금(血誠金)·애국금·인구세를 거둬 임시정부에 제공하였으며, 8월 27일 하와이 한인을 규합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군사운동을 적극 후원하기 위해 찬무회를 조직하였다. 이와 더불어 10월에는 이전부터 추진하였던 동지회와 국민회 간의 합동 교섭을 다시 추진하였다. 같은 해 12월 국민회의 총회장과 부회장의 임기를 1년에서 2년으로 연장하고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모든 사업을 정지하고 혈성금 모집에 총력을 기울여 임시정부에 제공할 것을 결의하였다.
회칙 개정으로 1938년도에도 총회장으로 연임되어 그해 3월 중국 부상병과 난민 구제금 모집을 찬조하였으며, 같은 해 3월 고 안창호 선생 추도회를 거행하였다. 1938년 6월 이민 1세 노인 동포들을 위해 1935년부터 실시해 오던 호상부제도 확장 안을 발표하고 호상부를 조직한 뒤 호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과 1940년에도 국민회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1940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한국독립당이 설립되자, 그해 5월 하와이애국단을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로 개칭하고 활동하였다. 1941년 1월경 하와이 각 단체 연합 임시대표회에 성공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3월에는 광복군후원금 관리위원회 재무를 맡았다.
1941년 4월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립하고 호놀룰루에 의사부,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를 두었다. 이때 그는 동지회 대표 손승운과 함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공동회계원(재무)로 선임되어 대한광복군후원금 청연문을 발표하고 자금을 모으는 한편, 독립금 수봉위원을 겸하기도 하였다. 7월에는 안원규 등과 인쇄사업소를 설립하여 이사가 되었고, 12월에는 동지회와 연합하여 월간 영자신문 『연합한미보(United American-Korean)』를 발행하기로 합의하고 이사원이 되었다. 1942년에도 총회장과 『국민보』 사장으로 활동하면서 동지회 기관지인 『태평양주보』 사장 손승운과 만나 『국민보』와 『태평양주보』의 『연합보』를 내기로 합의하였고, 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재무부 위원이 되어 독립금 등을 수금하였다. 3월 이원순과 함께 하와이 대표로 선정되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1차 위원회에 참석한 뒤 4월 캘리포니아주 중부의 한인 동포를 심방하고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를 방문하여 이승만과 의견을 교환하고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6월 하와이로 귀환하였다.
1943년에도 국민회 총회장으로 활동하며 한인의 미국전시공채 매입을 독려하고, 4월에는 중국구제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주미외교위원부에 독립금을 송금하였다. 6월 미국 상하외교위원회에 한국임시정부 승인안이 상정되자, 국민회를 대표하여 임시정부 승인 결의안 찬성과 통과를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으며, 8월 하와이 각지를 순회하며 한미승전후원금을 모집하였다. 1944년에는 국민회 총회장과 호상저금회 이사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재무로도 활동하였다. 5월에는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부단장으로 선출되었으며, 9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전체대회에서 외교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5년 1월 9년간의 국민회 총회장에서 물러난 뒤 팔라마·호놀룰루지방 참의원으로 선임되었고, 4월 전후한국구제위원회(戰後韓國救濟委員會)를 창립하였다. 같은 해 6월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 비서로 선임되었고, 7월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한국대표단으로 선임되었으나, 사고로 국내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계속 미국에 남아 같은 해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이사부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6년 1월 연합위원회 위원장으로 국내의 한국대표단으로부터 정국을 보고받는 한편, 해방 이후에도 계속 독립금 등 재정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8월 15일 조국의 해방과 연합국의 승전을 위해 축하식을 거행하였고, 10월에는 호놀룰루 푸누이지방 룩거리 동편에 대한인국민회총회관을 건립 개관하였다. 1946년 12월 14일 다시 국민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1947년 1월 대의회를 열고 의지할 데 없는 한인 1세대 노인들을 위해 양로원을 설치하고, 신탁부를 두어 재정 확충에 노력하였다. 5월에는 『국민보』 식자기계를 새로이 구입 설비하고, 8월 몽양 여운형 선생 추도회를 주관하였다. 10월에는 한국유학생후원회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선정되었고, 12월 국민회에 참의원회를 다시 설치하여 각 지방 구역대표를 선정하였다. 1948년 6월 하와이 한인40년사 편찬을 위해 위원을 모집하였고, 10월 한국어방송을 후원하였으며, 『국민보』 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49년과 1951년 5월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감찰을 지냈다.
1961년 1월 13일 하오 1시 30분 와히아와지방병원에서 별세하여 같은 달 18일 한인감리교 예배당에서 발인한 뒤 누아누 묘지에 안장하였다.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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